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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Apr 06. 2024

브런치 '구독자'와 브런치를 먹다

- 피천득 님의 '인연'을 다시 읽다

'별꽃자리' 

별꽃자리는 하늘 뷰, 산 뷰, 들 뷰, 밭 뷰, 강 뷰, 마을 뷰를 동시에 다 볼 수 있는 360도 뷰 맛집이다.


[별꽃자리 2층]

대구 여동생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느지막이 출발하여 '별꽃자리' 베이커리 카페로 갔다. 거기서 K샘과 N샘을 만나기로 했다. 달포 전에 보내두었던 카톡을 잊지는 않았을지, 또 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지 자못 궁금했다.


별꽃자리에 도착하니 두 분이 먼저 1층 프런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데자뷔 같았다. 지난번 대구 방문 때도 똑같았다. 다만 여름옷과 겨울 옷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반가움에 코끝이 시큰했다. 바쁜 일정을 쪼개어 시간을  그분들의 맘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K샘은 오래전부터 지냈던 지인이고 N샘은 나의 브런치 구독자가 되면서부터 인연이 된 분이다. K샘과 N샘은 나의 브런치 구독자다. 그날, 브런치 구독자와 별꽃자리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https://brunch.co.kr/@mrschas/124




K샘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 좀 지나서였다. 집안 사정 상 급작스럽게 낙향했을 때였다.


나는 미발령 교사였다. 대학에 다닐 때는 미래에 대하여 눈곱만큼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왜 앞 일에 대해 눈 뜬 당달봉사 같았을까? 국립 사범대를 졸업하면 그냥 의무 발령이 되게 하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그 제도를 나는 맹신하고 있었다. 졸업만 하면 교사가 될 것이라고... 그냥 무방비였다. 그러나 친구들은 하나, 둘 제 자리를 잡아갔다.


부모님이 우리를 공부시키려고 얼마나 피땀 흘리셨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랬더라면 나는 졸업 전에 미래를 챙겼어야 옳았다. 에라, 딱밤이나 하나 먹어라. 그 시절, 나를 혼내고 싶다. 철딱서니가 없었다. 그냥 사랑에 빠져 지냈다. 산과 바다를 찾아다니며 놀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그 시절의 나는 옳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내고 싶다.


친구들은 섬으로, 산골로, 또는 부산으로 발령이 나거나 직장을 잡아 떠났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는 친구들을 찾아가서 몇 날씩 머물렀다. 그런 모습으로 고향에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에 넘치도록 힘겹게 우리를 공부시켰다. 비아냥댔던 사람들에게 거봐라 할 작정이었는데... 어머니는 나의 미발령으로 보기 좋게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한 셈이다.


아버지는 간경화와 식도암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셨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코가 쭈욱 빠진 채로 낙향했다. 아버지는 투병이란 것도 제대로 못하시고 급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메꾸어야만 했다.


지식인이 지식과 전혀 상관없는 노가다 일로 시간을 보냈다. 연탄 배달을 했고 신발을 팔았다. 신문 보급소 일도 했다. 날이 새면 눈을 떴고 밤이 되어도 제 때 잠을 자지 못하며 일독에 빠졌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이미 우리 가정은 일이 아름드리 벌어져 있어서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 고향 교회에서 K샘을 만났다. K샘과 나는 교회 성가대원이었다. K샘은 프로급 찬양자였고 나는 음치 중의 음치였다. 그래도 어우러져 찬양하는 성가대는 오디션이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도 성가대원 자격이 주어졌다.


K샘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나의 고향에 있는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발령이 나신 분이다. 마침내, 운 좋게, 나는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을 낙향 이후에 만난 셈이다.


K샘은 문교장 댁 아랫채에서 자취를 다. 나는 여자용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걸어 다니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 자전거를 타고 틈을 내어 K샘의 방에 들르면 향긋한 풋사과와 커피가 있었다. 냄새나고 억센 사람들과 상대해야 했던 내게 K샘의 자취방은 삶의 창이었다. 그 방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 못 가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제철이 되면 풋사과는 꼭 챙겨 먹는다. 그걸 와그작 베어 먹을 때면 알 수 없는 설움이 목까지 차오곤 했다. 좋은 커피 향을 맡을 때면 K샘이 생각났다. 목을 타고 넘어가던 커피가 코끝을 시큰하게 하곤 했다.


K샘의 자취방이 면사무소 앞으로 옮겨졌다. 그 집에는 옥상이 있었다. 우리는 옥상에 올라가서 별을 세곤 했다. 만 밤하늘에는 우리들이 나누는 대화 속 단어만큼이나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주로 하나님에 대해, 문학에 대해, 별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 얘기했다. 특히 문학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K샘은 그때부터 문학으로 많이 쏠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원래부터 K샘은 문학에 관심이 많았을 수도 있다.


어느 날부터 K샘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K샘의 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K샘이 고차원적인 시를 썼던 것 같다. 나는 시를  읽을 줄 모르는 무지렁이였던 것 같다.




그 후에 나는 후다닥 결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맞선을 보고 그날 결혼 날짜를 잡았다. 솔직히 그때의 내 결혼은 사랑보다는 도피였다. 결혼을 하여 그 지긋지긋한 고향의 삶을 청산하고 싶었다. K샘은 내 결혼식에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축가를 불렀다. 직장인이 그런 시간을 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당시에는 K샘의 그 과분한 응원을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 이 지에서 나는 또 한 번 딱밤을 맞아야 할 사람이다. 나란 사람은 왜 그을까? 그때 내 성향에 F라고는 한 스푼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 흔하지 않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K샘의 외삼촌은 택시 기사였다. K샘은 외삼촌을 우리의 가이드로 예약해 두었다. 우린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외삼촌이 모든 것을 다 예약해 두었다. 그리고 신혼여행 내내 외삼촌이 우리를 가이드했다. 외삼촌은 우리의 모든 장면을 쉼 없이 사진으로 찍어 주셨다, 그리고 둘째 날 저녁에는 K샘의 본가에도 초대받았다. K샘의 혈육 중 누군가의 혼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주도 전통 결혼식 후의 풍경을 봤다. 그날 저녁은 K샘의 본가에서 제주도 잔치 음식을 먹었다. 신혼여행 중에 남의 잔치집에 가다니... 그랬다면 그때 그 댁에 저녁 값으로라도 그 혼사에 축의금을 냈어야 옳았다. 꿀밤 한 대 또 맞아라. 못났다. 정말 나란 사람은.




결혼 후 신접살이를 시작한 반지하 방으로 K샘을 비롯한 교회 청년들이 찾아왔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 먼 길을 와 주었는지? 참 고맙고 고맙다. 모두들... 


그 이후로 나는 결혼 생활에 빠져 K샘을 만나지 못했다. 간간이 들리는 소식은, K샘이 교직에 사표를 냈다느니,  일본어를 독학한다느니, 일본으로 갔다느니 하는 것이었다. 혹시 일본 문학을 공부하러 갔나? 그렇게 나는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가 드문드문 K샘의 소식이 들렸다. K샘이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학위도 받았다고 했다. K샘은 한평생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사셨다. K샘으로부터 몇 권의 자작 시집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 문학 번역서도 받았다.


그런데 K샘은 오랫동안 몹시 심하게 아팠다고 들었다. 그런 소식은 K샘과 동문이었던 남동생을 통하여 전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수소문하여 K샘을 만나러 갔어야 옳았다. 이 지점에서는 꿀밤을 연타로 맞아야 다. 참 못났다. 나는.


 결혼을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럴 때 내가 가서 축가는 부를 수 없더라도 그곳엔 갔어야 했다. K샘은 아마 희귀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12년 전에 페이스북을 통하여 내 아들의 사고 소식을 접했단다. 그때부터 K샘은 아들을 위해 후원을 시작했다. 아픔이 아픔에게 후원하는 것은 반칙이다. 그래서 나는 온통 K샘에게 빚진 자다. 빚 투성이다.


그리고 내 맘 속에는 그때, 내가 문학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으면서 괜히 잘난 척했던 것을 이제야 고백한다. 내가 허언에 가깝게 허풍을 떨어 K샘에게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어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내가 그때 바람을 넣지 않았더라면 교직에 머물며 관리자도 되고 정년퇴임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꿀밤이 아니라 나의 주둥이를 때려주고 싶었다. 자발없었던 나의 청춘이여~



세월이 무던히 흐른 후, 드디어 우린 별꽃자리에서 해후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K샘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세월이란 바람은 무자비하게  K샘의 얼굴 위를 휩쓸고 갔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보들보들한 솜털은 사라지고 도자기 같던 피부도 온데간데없었다. 어쩌면 K샘이 바라본 나의 얼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우리는 서로를 거울 보듯 바라봤다. K샘이 평생을 외롭게 살아왔을 것 같아 더욱 맘 아팠다. 내가 따뜻하게 손을 내밀지 못했던 것이 진심으로 미안했다.


두어해 전에 K샘을 해후했을 때, 나는 K샘의 눈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몹시 미안했다. K샘이 영육 간에 약하여 투병하며 지낸 영욕의 세월의 배후에 내가 아무래도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K샘을 찾아갔어야 했고 K샘의 지지자가 되었어야 했다. 내 살기에 바빠 K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K샘, 죄송해요. 제가 아무래도 K샘 인생에 돌팔매를 던진 듯해요."


유행가 가사가 문득 생각났다.


당신은 내 인생의 방관자면서~

당신은 내 인생의 제삼자면서~


"그런 생각, 하지도 말아요. 원래 저는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K샘은 상상 외의 말을 했다. 교직에는 원래 잠시 머무를 생각이었단다. 대학원을 다니고 박사학위를 받으려는 계획이 애당초 있었다고 했다. 휴우, 그 소리를 들으니 다소 마음은 편안해졌다.




K샘은 한사코 브런치 값 카드결제를 자청했다. 기회를 또 놓쳤다.

그런데 별꽃자리 대표님, 우리 조카, 참 꽁생원 같다. 나라면 이모가 지인과 함께 카페에 들렀으면 쿠키 한 조각이라도 덤으로 챙겨줄 텐데...'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던가? 우리가 주문한 그대로 트레이가 배달되었다. 어쩌면 그게 별꽃자리 대표님의 매력일 수도 있겠다.



아쉬운 이별을 하고 별꽃자리를 나서려는데 3층에서는 라이브 공연 리허설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 음악과 자연과 커피가 어우러지면 그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https://www.instagram.com/tv/CgZdXOJl1va/?igsh=dmd2a3VsMGo0bTcw

(별꽃자리 3층 무대에서는 간간이 연주회가 있다.)


K샘과 헤어진 후에 피천득 수필가의 '인연'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수필의 백미 그 '인연'은 내용도 좋지만 제목 자체만으로도 감동이 되기 때문이다. K샘과 나는 인연이 깊다. 나는 이제 K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리고 만고의 명문인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어봤다. 참 그러하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별꽃자리  #브런치  #구독자  #돌팔매  #인연 #피천득


PS: https://blog.naver.com/leesk0523/22081336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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