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성경, 사도행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는 말이 있다. 진주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보러 나선 김에 대구에 사는 여동생도 보고 올 참이었다. '내가 진주에 갔다가 대구도 보아야 하리라. 내 여동생도 보아야 하리라!' 바울의 말을 패러디하며 출발했다. 지난번에도 같은 루트로 다녀왔다.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아서 내디딘 걸음에 만날 사람을 만나고, 볼 사람을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의 출타는 순방을 방불케 한다.
대구에 사는 여동생 부부에 대하여, 어떤 지인은,'의지의 한국인'이라고 명명했다. 여동생 부부는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묵묵하게 일하며 살아왔다. 맨바닥보다 더 깊은 수렁에서 시작한 삶이었다. 그러나 성실하게 살더니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는 자산가의 수준에 이르렀다. 여전히 그 부부는 현장에서 초심 그대로 일하고 있다.그들을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부를 만하다.
몇 년 전에 여동생이 공장을 지을 부지를 사자마자 곧바로 그곳이 자치단체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곳으로 선정되었다. 그래서 매입가의 몇 배로 보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쓸모없던 땅이 중요한 곳으로 변신해 버렸다. 그들이 손을 대는 곳마다 신기하게 좋은 일이 생겼다. 그들이 안목이 있는 것인지, 운이 따르는 것인지...
코로나 직전에는, 자기네 공장 앞의 허물어져가는 식당을 시세보다 3억이나 더 주고 구입했다. 큰돈을 들여서 그곳을 대형 베이커리 카페로 짓기 시작했다. 간이 콩알만 한 나는, 코로나가 전 세계를 삼키는 시국에 어마한 청사진을 가지고 건축을 시작하다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일까? 내로라하는 카페들도 '거리 두기 제한'으로 문을 닫는 시국인데, 어찌하려는지? 라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여동생의 빌딩 건축이 끝날 때쯤에 '코로나19 사회적 거리 두기'가 공식적으로 해제됐다. 신기했다. 그런데정작 여동생이 그 카페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었다. 평생, 외길 인생으로 해오던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카페를 돌아볼 여력도 없었다.
"아마 이 건축이 마무리될 때쯤이면 코로나도 끝날 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럴 것 같아. 촉이 오네."
"뜬금없네. 네가 예언하는 문어냐?"
우리는 통화할 때면, 그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동생 말대로, 3년 넘게 기승을 부리던 코로나는 시부지기 우리 곁을 물러가고 있다.
여동생의 둘째 아들이 대표가 된 그 대형 베이커리 카페는 매일 사람이 북적댄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행복한 비명이다. 여동생은 틈만 나면 주차 요원으로 수고한단다. 카페를 찾는 손님들의 차가 많아서...
대구에 도착하니 여전히 여동생 부부는 바쁜 일상이었다. 대형 베이커리 '별꽃자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베이커리 대형 카페는 360도 뷰로 지어졌다. 요즘은 논 뷰, 밭뷰까지 말하는 시대다. '별꽃자리'는 도심 뷰, 산 뷰, 하천 뷰, 논 뷰에다 하늘 뷰까지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뷰 천국이고 뷰 맛집이다.
[화장실/3층 내부]
요즘 카페 인테리어는 어딜 가나 신박하고 멋지다. 별꽃자리에서 내가 특이하게 본 것은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거울에 전원버튼 모양이 있다. 그걸 누르니 세면대가 환해졌다.
3층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공연을 할 팀들이 예약하기도 한단다. 그리고 노래나 연주할 분을 초대하여 3층에서 공연하는 이벤트도 종종 한다고 했다.
월드컵과 같은 핫한 중계가 있을 때도 그 스크린이 쓰인다. 평소에는 화면보호기 같은 것을 띄워놓고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카페 내부 곳곳에는 아름드리 화분이놓여 있다. 편백 테이블은 물론, 곳곳에 쉬고 싶은 분을 위하여 '편백 온수 소파'도 세팅되어 있었다. 의자 등받이도 창의적이었다. ㄷ, ㅌ, ㅍ, ㅎ, 등등 한글 자음 모양으로 특별 주문된 것이었다. 카페의 안과 밖이 모두 자연친화적인 카페였다.
"야, 여기 너무 좋다. 내가 퇴임하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와서 아르바이트하면 안 될까?"
"우린 젊은 사람이 필요 해."
"그러면 너의 업무를 좀 도와주는 아르바이트 하면 안 될까?"
"그건 내가 눈 감고도 할 수 있어. 괜찮아."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야멸찬 거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동생의 마음을 안다. 퇴임 후에 다른 일을 할 생각 말고 아들 간병이나 잘하며 쉬라는 맘이라는 것을...
여동생에게는 베이커리 카페를 지은 그 건축이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큰 공장을 또 하나 더 구입했다. 그리고 또 다른 건축도 계획 중이란다. 여동생과 얘기하다 보면 몇 십억은 그냥 우리가 시장에서 물건 사는 듯한 액수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억, 억하는 소리가 그냥 친근하게 들렸다. 뱁새가 황새랑 놀려면 다리가 찢어지지 않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가 도착했다고 여동생 내외는 다른 날 보다 일찍 퇴근했다. 일을 덮어두고 집으로 향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민폐는 아닌지, 바쁜 사람을 붙잡은 건 아닌지...
그날은 바레인과 아시안컵 E조 축구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여동생네는 60평짜리 아파트에 산다. 거실에 매달린 TV가 무척이나 컸다. 축구 중계방송을 시청하니,축구하는 현장에 가서 실물을 관전하는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직접 공을 차는 듯했다. 특히 손흥민이 클로즈업될 때는 더욱 보기 좋았다. 그날 이강인은 멀티 골을 넣었고 대한민국이 이겼다. 거실이 큰 아파트에서는 스포츠 중계를 그만한 TV로 보니 제맛이었다.
"도대체 이 TV는 몇 인치냐?"
"85인치."
"볼 시간도 없을 텐데 TV를 왜 저렇게 큰 걸?"
"OO이가 샀어. 걔가 본다고."
OO는 여동생네 큰 아들이다.
그나저나 들어보니 85인치 그TV의 가격이 꽤 비쌌다.
거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도 어마했다. 도대체 저렇게 큰 샹들리에는 어떻게 부착하는지?
"우린 저런 거 줘도 못한다."
"왜?"
"갑자기 위에서 떨어질까 무서워서..."
"별 걱정을 다하시네."
우린 그냥 LED 전등만으로 밝게 살 수 있잖은가?
여동생네는 사업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집안은 그냥 텅텅 비어 있다. 밤에 잠만 자러 올 뿐이다. 그 점에서 묘한 허무함을 느꼈다. 좋은 집, 좋은 물건 들여놓고도 사용할 시간이 제대로 없는 아이러니였다.
엄마가 지냈던 방도 쓸쓸하게 비어 있었다. 엄마는 그 방에서 미싱질을 하고 신문을 읽으셨는데... 이제는 섬망 증세가 심해져서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계셔야만 한다.
"우리는 이런 집에 살아라 해도 못 살겠다. 크기만 하고 뭔가 휑하다."
"별소리를 다 하시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축구도 보고, 맛있는 것도 함께 먹었다.
이튿날 아침에 여동생 내외는 일찌감치 출근했다. 뒤늦게 일어난 우리 부부는 직접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주방이며 화장실에 뒷손 갈 것이 있나 살펴봤다. 청소도 하고 정리도 했다.
항상 형제들을 챙기고, 이웃을 돌아보는 내 여동생이다. 여동생은 여러 군데의 미자립 교회를 돌아가며 매달 돕는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돌아볼 사람들을 챙긴다. 그런 여동생이 참 자랑스럽다. '여동생' 없는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멋있는 여동생이 있어서 참 좋다.
P.S. 울산에 사는 오빠 내외가 지난번에는 대구까지 달려왔었다. 오빠네의 노쇼가 아쉬웠다. 이번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마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구까지 간 김에 오빠 내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