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채 무침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서너 군데 초등학교로부터 애들이 진학해 왔다. 생판 몰랐던 친구들을 새롭게 만나니 초등학교 때 지냈던 친구들이 시시해 보였다.
병자(환자라는 뜻이 아니라 내 친구 이름)는 나와 다른 학교, 월광 초등학교 출신이었다. 병자는 윤기 반지르르한 단발머리였다. 피부는 촉촉하고 입술은 붉은 앵두 빛깔이었다. 손은 하얗고 오동통했다. 병자가 입은 교복은 유난히 간지났다. 병자는 뭐든지 세련되어 보였다. 촌티 구질구질했던 내게 병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병자가 웃을 때 입안에 보철한 치아가 살짝 보여 그것도 은근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야매 돌팔이에게 갔다. 경미한 충치인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보철을 씌워 달라고 했다. 그런 후에 거울을 보며 예쁜 표정을 지어 웃어봤다. 그랬지만, 까르르 웃을 때마다 입안에 고른 치아가 환하게 보이며 보철한 치아가 반짝거리던 병자처럼 보이지 않아 속상했다.
우리는 단짝 친구가 됐다. 다른 친구들도 병자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 했다. 병자는 뭘 해도 멋지고 예뻤다. 선생님들도 병자를 예뻐했다. 병자네는 대구에서 이사 왔다. 병자네는 월광 도로가에 있는 상가에서 간이 정류소를 했다. 병자네는 상가에 딸린 방에서 살았다. 월광은 완행 버스만 섰다. 월광, 하림 쪽에 사는 애들은 그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남자 애들은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병자는 셋째 딸이다. 위로 언니들 이름은 갑자와 을자였고 동생은 정자다. 갑, 을, 병, 정으로 맞춘 이름이다. 병자 아버지는 검은 가죽 재킷을 즐겨 입었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눈빛만 봐도 병자를 예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병자가 노래를 부르거나 농담을 하면 병자 아버지 입꼬리가 귀에 걸리곤 했다. 그와 달리,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 앞에서 농담을 하거나 아버지와 눈을 맞춰보지 못했는데... 병자 엄마는 정류소를 겸한 점방에서 장사를 했다. 주로 아이들의 주전부리를 팔았다. 병자 큰 언니, 갑자는 정류소 운영을 맡았고 을자 언니는 폐병을 앓고 있어서 낯빛이 하얀 종이 같았다.
중1 봄소풍은 월광사로 갔다. 애들은 도로 한쪽으로 나란히 한 줄로 서서 월광사로 걸어갔다. 유명 관광지, 해인사 입구라 쉼 없이 관광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때마다 우리는 관광버스를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학교에서 아침, 저녁으로 '손흔들기'를 잘하라고 훈화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다른 애들보다 일찌감치 출발했다. 병자를 만나서 소풍 갈 참이었다. 내가 병자네 정류소 영창 미닫이를 열 때였다. 병자 엄마는 큰 언니에게, "애기 스타킹 어디 있노? 오늘이 무슨 날인 줄 모르나? 아직도 스타킹을 안 찾아 놨나?"라며 소리쳤다. 옆에 있던 을자 언니는 하얗게 질려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가 스타킹을 찾느라 쩔쩔매고 있었다. 정자도 스타킹을 찾느라 분주히 여기저기를 들추고 있었다. '아, 병자는 집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사는구나. 그래서 병자가 복스럽고 예뻤던 것이구나. 병자는 집에서 공주였구나, 학교에서는 인기쟁인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할머니는, 오빠 바로 밑에 태어난 내가 딸이라는 것 때문에 , "훌륭 대장, 우리 손자 젖도 못 먹게 재수 없게 식잖은 가시나가 태어났네."라며 쇠죽솥뚜껑을 소리내어 여닫으셨다. 엄마는 아들 밑에 연달아 아들을 낳지 못해서 산후조리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출산한 날 곧바로 들에 일하러 나갔다. 그래서 딸만 넷인 집에서 병자를 귀하게 여기며 온 식구가 챙겨주는 것이 내겐 생경스러웠다. 어떤 집에서는 딸도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것 잊지 않았제? 황태채 무침, 애기 도시락 반찬으로 잘 담아놨제?" 병자 엄마가 갑자 언니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나도 모르게 내 도시락을 만지작거렸다. 도시락을 어디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엄마는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셨고 소풍 가는 날인지도 모르셨다. 설령 소풍날이라고 말했더라도 도시락 반찬에 신경쓰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 스스로 내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은 별게 아니었다. 꽁보리밥에 김치였다. 허여멀건 배추김치 몇 가닥을 담았을 뿐이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황태채 무침 앞에 내 도시락 뚜껑을 열 자신이 없었다. '아, 소풍 갈 때 도시락 반찬에 별도로 신경을 쓰는 것이구나,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하여 도시락을 챙기는 것이구나. 대구 사람들은 그러는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병자는 노래도 잘 불렀고 글씨도 반듯하게 썼다. 그런 병자가 어느 날부터 운이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운이라면 내가 쳐다보지도 않던 남자애였다. 운이도 병자를 좋아하고 병자도 운이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즈음에 예쁜 편지지를 사는 것이 유행이었다. 예쁜 편지지에 '초혼'이나 '진달래꽃' 같은 시를 적었다. 잉크에 펜촉을 담가 시를 예쁘게 적어 맘에 드는 친구에게 보내곤 했다. 그래서 다들 편지 짝꿍이 있었다. 그 시절에 읽었던 '초혼'이나 '진달래꽃' 시구절은 가슴에 살며시 내려앉는 것 같이 절절했다.
<초혼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중략) 출처 : 고대신문(http://www.kunews.ac.kr)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중략) 출처: 나무 위키
나는 거의 모든 남자 애들에게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답장을 해 준 적은 없었다. 창수는 초록색 잉크로 적은 편지를 보내왔다. 내게 직접 전해 줄 용기가 없었는지 우표를 붙여서 보냈다. 날마다 배달부 아저씨가 편지를 전해주어 창피했다. 창수는 '초혼'이나 '진달래꽃'을 적는 게 아니라 철학자, 문학가가 했던 말을 적었다. 대학생이던 형의 책에서 베낀 것이었다. 창수는 악필이었다. 초록색 잉크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삐뚤빼뚤하게 빼곡히 적은 그 편지는 볼 맘이 생기지 않았다. 정이 떨어졌다. 아, 창수야 제발 좀 그만해라. 창수가 보내온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봉투채로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초록색 글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창수한테 질렸다.
어느 날, 운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답장을 해주고 싶었다. 운이와 병자가 서로 꽁냥꽁냥 지내는 모습이 좋아 보여서 그랬을까? 아무튼 걔네들은 가관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바깥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1분단과 4분단에서 얼굴을 책상에 대고 서로 눈을 맞추곤 했다. 병자는 교복 안에 병아리색 폴라티를 받쳐 입곤 했다. 노란색 폴라티 속에 웃고 있던 병자 얼굴은 인형같이 고왔다. 이따금 운이는 쌍꺼풀 낀 눈으로 병자에게 윙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 병자는 보철한 이를 반짝반짝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걔네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니 질투도 나고 부럽기도 했다.
- 너네 둘이 지내는 것 보니 부럽더라. 나도 병자를 좋아하는데 너는 병자를 진짜 좋아하나 봐.
라고 운이에게 답장을 썼다. 곧바로 운이에게서 답장이 왔다.
- 사실은 나는 네가 좋은데, 내가 편지 보내 봤자 네가 보지도 않을 것 같아서 너의 단짝 친구, 병자에게 편지 보냈어. 그러면 네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일까 봐.
- 거짓말 마. 너 정말 병자 좋아하는 것 다 알아. 병자도 너를 좋아하는 것도 알고... 둘이 잘해 봐.
라고 답장을 보냈더니 운이는 연거푸 내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느라고 운이가 병자에게는 소원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 병자가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예뻤던 병자가 싸움을 걸어오니 무서웠다. 나는 당황했고 미안했다. 할 말이 없었다.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났노? 남의 남자 친구나 빼앗아 가고..." 병자가 나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그 예뻤던 병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병자와 운이의 풋사랑은 끝이 났다. 운이는 주야장천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난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 일 이후로 병자는 나와 의절했다. 나는 몹쓸 인간이 되고 말았다. 병자를 좋아하는 맘이 지금도 여전한데 병자는 여전히 나를 싫어할까?
운이와 병자, 그리고 나,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잘못한 것일까? 난 왜? 병자한테 고개도 못 드는 죄인처럼 팍 쪼그라들었을까? 운이 그 자식을 만난다면 다 물어내라고 하고 싶다.
오랜만에 옛 시절을 생각하니 병자가 중1 소풍 때 도시락 반찬으로 싸왔던 황태채 무침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제는 맘만 먹으면 만들 수 있잖은가?
황태채 무침 레시피다.
- 황태포를 먹기 좋게 자른다.
- 왕소금을 넣고 여러 번 씻는다.
- 물기를 꼭 짠다. (물에 담가 두었다가 조리하라는 레시피대로 해본 적 있는데 그건 비추다.)
- 먼저, 들기름을 두르고 조물조물 무쳐준다. 이때 들기름이 황태에 코팅되어 고소하다
- 고추장, 고춧가루, 매실액, 액젓, 올리고당, 참기름을 잘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 준비된 황태에 양념장을 끼얹고 골고루 무쳐준다. 마지막으로 통깨를 뿌린다
사춘기 추억이 서린 황태채 무침이 완성됐다. 이런 황태채 무침을 먹으며 가족 사랑 듬뿍 받고 자란 병자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병자를 해후한다면 황태채 무침으로 밥 한 끼 먹고 싶다.
철없던 시절
티격태격했던
우리의 사랑놀이도
한 때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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