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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병에 '효자' 없다지만 '동행자'는 있더라고요

- 미역국

by Cha향기

9월 3일, 여름을 어찌어찌 보내고 딸을 낳았던 날이다. 딸내미는 낼모레, 자기 생일이라고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으려나? 딸에게 맛있게 한 끼 식사하라며 축하금을 보내고, 산모였던 나를 위해서 미역국을 끓이기로 했다. 그래서 횡성 한우와 자른 미역을 준비했다. 딸을 낳은 후, 삼시세끼 먹어도 질리지 않았던 그 미역국 맛이 과연 날는지 모르겠다.


미역국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니 L 사모님 생각이 울컥 났다. 미역국을 잔뜩 끓여 봉지봉지 소분하여 전해주시곤 했던 사모님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이 년도 아닌, 무려 13년 동안이나 우리와 동행하며 먹거리를 챙겨주셨다. 미역국 끓이던 불을 잠시 줄여 놓고 사모님에 대한 글을 적는다. 제목부터 코끝이 찡하다.


제목: 슬픔이 슬픔에게

아기를 업고 있었다. 아기가 추위를 느꼈는지 내 몸에 자꾸 엉겨 붙었다. 덮어줄 것이라곤 없었다. 깊은 산속이었으니.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한길 쪽으로 무작정 걸어 나가 일단 아무 버스나 탔다. 그런데 그 버스가 더 깊은 산골에다 나를 내려놓았다. 집에 돌아갈 일이 막막했다. 단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이었다.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연계되는 버스가 없으니 택시라도 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GPS가 잡히지 않는 곳이어서 택시 앱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등에 업힌 아기가 아무 기척이 없어서 아기 포대기를 풀어보니 아기가 없었다. 돌산을 헤쳐 내려오느라 아기가 떨어진 줄도 몰랐다. 아기를 찾느라 다시 산으로 되올라가는데, 기저귀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아기는 보이지 않았다.

어휴, 꿈이었다. 다행이라고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사모님 걱정을 하다 보니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았다. 그동안 약물 치료를 받아오던 사모님이 결국 항암 주사를 맞게 됐다. 항암 주사를 맞으면 구역질이 날 것이며, 머리도 빠질 것이다. 벙거지 모자를 쓰실 사모님 모습이 어른거렸다. 삶의 질이 확 떨어지실 텐데...

사모님과 알고 지낸 지는 30년도 더 됐다. <한 지붕>이란 모임을 만들어 매달 한 번씩 인천대공원에서 만나곤 했다. 호숫가를 돌거나 숲길을 함께 걸었다. 텐트 안에서 치킨이나 김밥을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13년 전, 우리 아들이 절체절명의 자전거 사고를 당했다. 그때부터 아들은 세미 코마, 중증 환자가 되었다. 우리의 평화롭던 일상은 깡그리 사라졌다. <한 지붕> 모임도 무산되고 말았다.


어느 날, 사모님이 병문안을 오셨다. 대중교통을 탄 적이 없던 분이었는데 버스를 갈아타고, 전철도 환승해 가며 물어물어 오셨단다. “부담 가지지 말아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하시며 챙겨 오신 밑반찬을 꺼내놓으셨다.

지금까지 13년이 넘도록, 틈날 때마다 밑반찬을 대주셨다. 잘게 나누어 묶은 봉지에는 ‘쇠고기뭇국’, ‘미역국’, ‘돼지고기 볶음’, ‘잡채’라고 적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냉동실을 가득 채운 사모님의 반찬을 곶감 빼먹듯 챙겨 먹곤 했다. 사모님이 챙겨주신 반찬을 딸내미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런 사모님을 생각하며 적었던 시도 있다.


빈 가방
어미도 동기간도 아닌데 혈육으로 다가오시네
빈 찬통을 다시 담은 / 빈 가방 메고 되돌아가는 님
병간호하다 쓰러질까 / 맑은 미역국에 양지 사 보태고
아몬드 버무린 잔멸치 볶음 / 단골 메뉴 김무침에
누룽지 봉지마다 나눠 담고 / 13년 세월 타고 바리바리 나르시네
맘속까지 다 부린 빈 가방 가벼이 메고 / 총, 총, 총 떠나는 발길
맘속엔 화덕이 있어 / 곰국 같은 사랑이 뭉근히 끓는다


언젠가였다. 딸내미에게서 근사하게 차려진 식탁을 찍은 사진이 전송됐다.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네요.'라며 행복한 이모티콘도 함께 보내왔다. 딸내미네 식탁엔 쇠고기 미역국과 돼지고기 파프리카 볶음, 보리 굴비찜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공교롭게 그날 저녁, 우리 식탁에도 사모님이 주셨던 돼지고기 구이가 메인 반찬이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요리였다. 살코기를 갈비 양념에 재운 후 구운 것인데 갈비구이보다 더 맛있었다. 사모님은 만날 때마다, “힘들수록 잘 먹어야 이겨낼 수 있어요.”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한껏 껴안아 주셨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견뎌내기 힘든 여정 속에 있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사모님이 그토록 애지중지 신경을 쓰시는 걸 보니... 사모님의 훈훈한 응원 덕택으로 우리 부부는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소고기 산적을 해동하여 팬에 구웠다. 더 이상 사모님의 밑반찬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냉동실에 있는 먹거리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소고기 산적이 노릇하게 구워졌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산적 위로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그 힘든 과정을 사모님이 어떻게 버텨내실지, 완치될 수 있을지, 그런 생각에 소고기 산적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저희는 잘 챙겨 먹을 수 있어요. 이제 제가 퇴임했거니와 재래시장도 코앞에 있어요. 상가에 편의점도 있으며 로켓 배송, 새벽 배송을 해도 되니까 먹고사는 건 걱정이 없어요. 사모님이 치료만 잘 받으시면 됩니다. 기도할게요.”라고 사모님께 진심을 전했다. 그동안 사모님은 우리를 위해 땀을 많이 흘리셨다. 누군가의 땀은 또 누군가에게는 쉼이 된다. 사모님이 내민 손길은 우리에게 쉴만한 그늘이었다.

사모님이 항암약 부작용으로 손바닥, 발바닥 피부가 다 벗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크로스백과 손가방을 뜨개질하여 들고 오셨다. 한코 한코 뜨개질을 하실 때 사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먹거리 외에도, 사모님은 화장품이나 옷가지들도 챙겨주셨다. 마치 친정엄마가 딸을 챙기듯이….


그런데 이제 슬픔이(나) 또 다른 슬픔(L 사모님)을 마주하게 됐다. 슬픔이 슬픔을 본다는 것만큼 기막힌 아픔은 없으리라. 지난번 구정에 세뱃돈이라며 사모님께 봉투를 건네 드렸다.


“저는 뭘 챙겨드릴 게 없네요. 이거 약소하지만, 저희 맘이니 받아 주세요.”

만날 때마다 밥값은 우리가 결제하기로 아예 못을 박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 맘이 좀 편할 것 같았다. 사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틈틈이 사모님을 만나 재미있는 얘기를 나눌까? 소소한 여행을 다닐까? 아니면 사모님이 드실 만한 웰빙 요리를 해볼까?


날이 갈수록 사모님의 박꽃 같았던 웃음이 사라지고 있다. 나도 담장 너머로 가지 넌출을 뻗어 사모님께 닿고 싶다. [사모님을 생각하며 적어본 글]




브런치에 사모님에 대한 글을 몇 편 발행한 적이 있다.

'누룽지를 끓이다가 흘린 눈물'

<'Α~Ω'(알파~오메가), 곳곳마다 있는 좋은 당신!>

'마치, 친자매처럼, 엄마처럼'



며칠 전에 사모님을 만나고 왔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 계셨다. 항상 우리를 만나면 끌어 안아 주시며 맘 아파하셨던 분을 이제는 우리가 안아드렸다. 말 못 할 고통으로 수많은 밤을 보내셨을 사모님을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


딸 생일을 맞아 미역국을 끓이며 사모님 생각에 흠뻑 젖었다. 사모님은 미역국을 맛있게 끓일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요리 중에 제일 자신 있는 것이 미역국이라고 하셨다.


사모님이 알려준 미역국 레시피다.


- 키친타월로 소고기 핏물을 닦아낸다

- 미역은 10분 정도 불렸다가 먹기 좋은 크기로 가위질한다. (아예 자른 미역을 구입하면 편리하다.)

- 미역 불린 물을 버리지 않고 국물로 이용하는 것이 팁이다.

- 고기와 마늘, 참기름을 넣고 살짝 볶는다. (고기에 미리 간을 하면 잘 안 익는다.)

- 불린 미역을 함께 넣고 한참 더 볶는다.

- 어느 정도 볶은 후에 집간장을 넣는다.

- 이때 액젓을 가미하는 것이 포인트다.

- 미역 담갔던 물쌀뜨물을 함께 넣는다.

- 처음에 강불에 끓이다가 끓어오르면 물을 좀 더 보충한 후에 중불로 약 15분 정도 끓인다.


이 레시피대로 미역국을 잔뜩 끓였다.

[키친타월로 핏물을 닦아낸 횡성 한우 / 미역을 불리는 중 / 미역국 완성]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는데 사모님은 우리의 긴 병상생활 내내 동행자였다.

사모님 머리숱이 풍성해지면
벙거지 모자를 벗어던지고
예쁘게 파마도 하고
입술 붉게 바르고
우린 다시
<한 지붕>이 될 수 있겠지.

함께
바닷가에 갈 수 있겠지.

가을이 코너에 와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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