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숭아
내 고향은 가야산 자락에 있다. 쇠죽골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던 상엿집, 앞산 발치, 손바닥만 한 땅뙈기로 된 정구지밭, 마을 앞으로 흐르던 냇물...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향 산천은 의구하겠지.
고향을 떠올리면, 숙이네 옆 우물가에 있던 복사나무가 생각난다. 봄이 되면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하지만 그 우물가 복사나무에 열렸던 복숭아를 먹어 본 기억은 없다. 주인 없는 나무에 열렸던 복숭아였건만 땅에 저절로 떨어진 복숭아까지 죄다 숙이네 차지였다. 마을 사람들도 암암리에 그렇게 생각했다. 우물가에서 올려다본 복숭아는 발그레하고 오동통했다. 조무래기들은 침만 삼켰을 뿐 그 맛은 보지 못했다. 숙이는 복숭아를 우물가 담장 밑에서 아작아작 베어 먹곤 했다.
“저녀러 복숭아 때매 천불이 난데이. 에라, 복숭아 몽땅 사 와라.”
어느 날, 할머니는 보리쌀을 몇 됫박 주시며 ‘새나리’에 가서 복숭아로 바꿔 오라고 하셨다. 새나리는 신작로를 한참 지나 산모롱이를 돌아서 가야 했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징검다리까지 건너서야 그곳에 도착했다.
그날 내 친구, 선이도 함께 갔다. 선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학교로 전학 왔다. 선이 부모님은 교사였고 걔네 할머니가 선이 자매들을 돌봤다. 집안일을 하는 친척 언니가 선이네에서 함께 살았다. 선이네 집에는 신기한 게 쌔고 쌨다. 앙증스러운 소꿉놀이, 48색이나 되는 크레파스가 있었다. 갖가지 옷을 갈아입힐 수 있는 귀여운 인형도 있었다. 선이는 세일러칼라 옷에 단화 신발을 신었다. 검정 고무신에 책보를 메고 다녔던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선이는 규칙적으로 용돈을 받았다. 선이는 용돈으로 풀빵을 사 먹거나 만화방에 갔다. 그런데 그날 선이는 자신의 용돈으로 복숭아를 사겠다며 우리와 함께 새나리로 향했다.
새나리 과수원에서 보리쌀과 복숭아를 맞바꾸었다. 머리에 이고 갔던 보리쌀 무게보다 더 무거운 복숭아를 받았다. 선이는 가지고 갔던 용돈으로 복숭아를 서너 개 샀다. 과수원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 하늘을 올려다보던 선이 뺨은 나무에 매달린 복숭아와 닮아 보였다. 보송보송한 잔털이며 발그스레한 핑크빛이 영락없었다.
5학년 때, 선이 부모님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가뭄에 콩 나듯이 선이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소식을 뚝 끊고 산 지 몇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선이와 해후했다. 내 아들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여 사경을 헤매던 때였다.
“우연히 너의 카톡 프로필을 보고 알게 됐어. 힘들지? 한 번 보러 갈게.”라며 선이가 카톡으로 말을 걸어왔다. 어느덧 인생 황혼에 이른 우리는, 그간 어떻게 살았느냐는 말 따위는 나누지 않았다. 아들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알려주었더니 선이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묵은 친구는 형제자매나 진배없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친구의 아픔이 바로 자신의 아픔이었다. 어제 헤어진 듯이 그냥 친근하게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린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었다. 그날, 선이는 복숭아 한 상자를 들고 왔다. 선이도, 우리가 새나리에 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그날 선이가 사 온 복숭아는 크고 붉었다. 그런데 선이 뺨은 더 이상 복숭아처럼 발그레하지 않았다.
“나도 죽을 고비를 넘겼어. 뇌에 악성 종양이 생겼대. 수술하기 참 애매한 곳이라 알루미늄 호일 같은 것으로 우선 묶어 놨다고는 하는데...”
선이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편이 싸해졌다. 선이를 만나서 반가웠지만, 그런 상황인 선이를 보자니 먹구름이 잔뜩 낀 듯했다. 내 상처에 또 하나의 종기가 덧나는 것 같았다.
선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선이 몸에 있는 모든 세포가 잠들어 버린 것처럼 힘없어 보였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 병문안 올 생각을 했을까? 반들반들하고 새하얗던 손등에는 잔주름이 가득했다. 손톱 밑엔 뭔가 끼어 거무칙칙했다. 머리는 부스스했다. 입고 온 고동색 패딩점퍼 소매 끝에도 덕지덕지 때 자국이 묻어있었다.
아무리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도 선이는 그렇게 되지 않을 줄 알았다. 유년 시절, 내 로망이었지 않은가? 고생이란 걸 모르고 평생 살아갈 것 같았다. 평생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살 줄 알았다. 그러나 뇌를 건드려 놨으니 선이 인지 능력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이대 나온 여자지만 집을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는지 걱정됐다. 선이 가족들의 안부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한평생을 살아 보니 삶이란 한바탕 꿈같았다. 아, 그때 집으로 돌아가는 선이를 한 번 안아 줬어야 했는데….
그 이후로 선이 카톡 프로필을 간간이 보곤 했는데, 카톡 프로필 업데이트가 멈췄다. 마지막 장면에는 붉고 탐진 복숭아를 그린 수채화에,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고 적혀 있었다. 선이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선이는 괜찮은 걸까?
복숭아가 열릴 무렵이면 선이 뺨이 생각나곤 했는데 또다시 선이와 해후한 이후에는 선희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러나, '안녕?'이라는 톡 한 번 보내지 못했다. 13년째 세미 코마 상태로 누워 지내는 아들을 안고 사는 내 삶이 안녕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혹시 말을 걸었다가 예기치 못한 소식을 들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누가 카톡으로 말을 걸 수 있겠는가?
선이를 생각하며 적은 노랫말을 AI에게 주어 노래로 만든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mrschas/830
선이 카톡 대문 화면은 13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영어 전공자인 선이가 카톡 프로필에 적어둔 글귀는 생뚱맞게 스페인어였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AI에게 그 의미를 물어봤다.
나: No lo dude! Las cosas buenas toman tiempo. 친구의 카톡 대문에 적혀있는 글귀인데 무슨 뜻일까?
AI: 너무 멋진 문구네요! 스페인어 문장 **"No lo dude! Las cosas buenas toman tiempo."**는 한국어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이 말은 인내와 기다림의 가치를 강조하는 표현이에요. 급하게 서두르기보다는, 좋은 결과나 가치 있는 일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담고 있죠.
좋은 결과나 가치 있는 일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이루어진다.
#가야산
#복사꽃
#복숭아
#과수원
#신촌세브란스병원
#카톡프로필
#여름은_오래_그곳에_남아, #AI노래, #영어전공, #스페인어, #천천히_이루어진다, #인내와기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