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Lilac:연한 보라색, 라벤더보다 더 밝음)
오빠는 부두 쪽으로 갔고
국선 언니는 차에 있겠다고 했다.
엄마가 비워둔 집, 툇마루에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엄마와 나는 도라지밭으로 갔다. 엄마가 내 손을 끌었다. 처음으로 잡아 본 엄마 손이 삭정이처럼 퍼석했다. 엄마는 감정만 메마른 게 아니라 몸속 물기도 말랐다. 가죽만 남은 몸으로 걸어 다녔던 엄마라니. 그런 몸으로 평생을 살아냈다니. 엄마를 안고 싶었다. 엄마가 안쓰러웠다. 엄마는 먹는 게 살이 되지 못했나 보다.
비루해 보이는 집안 곳곳에 엄마의 한이 서려 있었다. 엄마를 살뜰히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밀고 올라왔다. 생전 가져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효도할 타이밍이 된 건가? 서울의 삶을 청산하고 율도로 내려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가 이해됐다. 본인이 잘못한 게 없었는데 죄인처럼 살았던 삶, 야코죽어 지냈을 엄마의 인생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도라지 꽃처럼 여릿한 엄마가 도라지 밭에 있다. 엄마의 눈빛은 야욕도, 욕망도 없는 무채색이다. 헛되고 헛되다는 인생길이 엄마에게는 헛되다 못해 야속했으리라. 도라지 꽃이 종내 마르고 시들 듯이 엄마도 결국은 한 줌의 흙이 될 걸 생각하니 가슴께가 저려왔다.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고 엄마가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서 시간을 많이 보냈제. 이 도라지꽃이 너거 아부지랑 나랑 인연을 맺게 해줬데이.”
새순으로 올라오는 도라지 잎을 만지며 엄마가 말했다. 도라지밭에서 부둣가 풍경이 보였다. 오빠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왔다 서성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오빠에게서 후광이 비취었다.
“저것 봐래이. 우리 창휘가 어릴 때 부둣가에서 아부지, 아부지 하믄서 손뼉 쳤다 아이가. 아마 창휘가 그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썰물로 바다는 바닥을 드러냈다. 오빠가 바닥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어릴 때를 생각하며 조개라도 주우려는 것일까?
여전히 동네 사람들은 장례식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앞소리 하는 여자의 구슬픈 만가가 그때까지도 마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차 타고 오다가 멀미를 한 것 같데이.”
엄마가 밭 가장자리에 있는 돌판에 걸터앉았다. 나도 현기증이 약간 일었다. 햇살은 무척 따사로웠다. 고양이 몇 마리가 야옹거리며 우리 앞을 어슬렁거렸다. 장례식을 보느라 정신이 빠진 사람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나도 엄마 옆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견딜 수 없어서 잠시 졸았다.
“야, 이것 좀 봐 볼래? 너거 오빠가 무슨 짓을 한 것 아닐까? 이걸 조수석에 놓고 사라졌네. 일단 나는 창휘 찾으러 갈게.”
까무룩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언니가 후다닥 도라지 밭으로 달려왔다. 언니는 숨이 멎을 듯이 말했다. 언니가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더니 차에 시동을 걸었다. 쪽지였다. 오빠 글씨였다. '미라보 다리' 시를 적었던 필체였다. 그 글씨는 내게 참 익숙하다. 언니가 던져주고 간 쪽지를 읽다가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나 하나만 없어지면
모든 게 제대로 되겠지.
나를 찾지 마.
난,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
(밤섬에서, 박창휘)
▲그림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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