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간 사람들, 남은 사람들 1
내 임용 내신 서류는 결격 사유가 없었다.
마침내 교육청으로부터 연수 대상자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발령 교사들에게 부전공 연수를 집중적으로 수료하게 한 후에
그 부전공한 과목으로 교사 발령을 낸다는 취지였다.
부전공 연수를 받기 전에, 내가 어떤 과목에 재능이 있는지 스스로 타진해 봤다.
자신 있는 과목으로 부전공 연수 수강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어, 좋아하고 자신 있기는 했지만 매우 세밀하고 깊게 공부를 해야 할 듯했다.
수학, 마음이 우울할 때는 정석 문제를 풀어보기도 할 정도로 수학을 좋아했으나 수학 교사가 될 자신은 없었다.
과학, 이 영역은 이해도 되지 않고 수업 시간에도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모두 내게는 넘사벽인 학문이었다.
사회, 기억력도 좋지 않을뿐더러 한국 역사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다.
세계사는 더더욱 젬병이었다.
음악, 일단 음치, 박치에 리듬도 못 탄다.
미술, 그림 그리는 것을 끊은 지 오래됐고 그 전문 예술 분야에 스킬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체육, 스포츠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나이에 체육 교사를 할 수는 없었다.
한문, 좋아했던 과목이지만 그 많은 한자를 어떻게 다 익히겠는가?
기술·가정, '가정' 분야는 그래도 할 만한데 '기술'은 이해할 자신이 없었다.
한 과목도 만만한 과목이 없었다.
차라리 없었던 일로 하고 그냥 지낼까 하는 갈등이 순간적으로 일었다.
【국어, 영어, 공통사회, 공통과학, 한문, 기술 교과의 경우는 부전공 연수를 통해
임용의 기회를 부여하게 되어 있다.
특별법에 따르면 ‘05. 6. 15.부터 30학점 이수, 450시간, 과목별 60점 이상 시 학점취득을 인정한다.
부전공 자격 부여는 부전공 과정 개설기관에서 과정 종료 즉시
이수 결과를 해당 시․ 도 교육청에 통보하고 당해 연도 9월 말까지 시, 도 교육감이 표시한다.
이렇게 되면 거의 15년의 공백을 가진 사람들이 짧은 기간의 연수를 통해 자격증을 취득하고
미발추의 내부적인 경쟁만으로 교단에 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물론 현재 임용고사 준비생들과 같은 날, 같은 시험지로 시험을 보지만
이들은 이미 우선해서 채용될 수 있는 정원을 확보했으므로
과목별 과락(대략 40점)만을 면하게 되면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채용될 수 있다.】(발췌:오마이뉴스)
한동안 맘이 복잡하고 심란했다.
곰곰 생각한 결과, 영어 과목으로 부전공 연수를 받아야겠다는 결단이 섰다.
10년 넘게 ‘영어 공부방’을 운영했고 중, 고등학교 때 영어 성적은 좋았으니
다른 과목에 비해 그나마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난 영어가 참 좋았다.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원어민과 소통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내 속에 한국적이지 않은 기질이 있다는 것을
그들과 대화하는 중에 알았다. 그들과 더 기질적으로 통했다.
또한 이과도 문과도 아닌, 학문 분야에 주변인 같은 내 성향에 어울리는 것이 바로 영어 과목이었다.
교육부에서는 미발령 교사를 위한 영어과 부전공 연수 장소를
서울대학교나 순천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서 실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에서는 그걸 거부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머나먼 순천대학교에서 연수를 받게 됐다.
다른 교과는 어디서 부전공 연수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영어 과목은 순천대학교에서 실시했다.
인천에서 순천까지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 즉 집 문에서 학교 문까지 8 시간 정도 걸렸다.
오죽하면 버스가 휴게소를 두 번이나 들렀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시작한 일에 대해서 웬만해서는 포기를 모르는 내 성격이, 그때 빛을 발했다.
고3, 중3인 자녀가 있는데 전업 수험생으로 뛰어들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미발령교사였다는 내 짓밟힌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니 끝까지 해볼 요량이었다.
영어 공부방을 운영하는 것이 수입 면에서
교사 급여보다 나았을지는 몰라도 안정적이진 않았다.
교사는 정년 퇴임할 때까지 보장되는 큰 매력이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교사라고 하면 일단 높이 사는 분위기였다.
내가 교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여러 갈래의 맘이 생겼다.
- 당연히 임용되었어야 했던 기득권, 그것을 상실한 좌절감 회복
- 어머니의 평생소원
-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직장
- 내 유년의 꿈 실현
인천에서 순천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이용하여 버스 터미널에 가서 시외버스를 타야 했다.
순천을 향하여 가던 첫날,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내 행보를 축복하는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가도 가도 한참 더 가야 하는 머나먼 길이었다.
연수에 참여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대거 포기했다는 말을 들었다.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 집을 떠나와서 몇 개월 동안 공부에 매진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그럴 법도 했다.
내가 순천에 도착했을 때, 캐리어를 끌고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부전공 연수를 받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서 왔다.
외국에서 귀국한 자도 있고 제주도에서 왔다는 이도 있었다.
대학에서 강사로 지내던 사람, 학원 운영자, 등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치열하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전공은 사회, 과학, 독어, 일어, 불어, 교육학, 등등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국어, 수학 과목은 당해에 발령이 났다.
순천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헤쳐 모여' 한 후에
한 배를 타고 부전공 연수를 수료할 운명 공동체가 됐다.
그날, 성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구약 사사기 7장에 나오는 일화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미디안 군대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모으는 과정이 나온다.
처음에 32,000명의 군사를 모집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 전쟁에서 내가 개입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군사의 수를 줄일 것을 명령하셨다.
기드온은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알렸고,
이때 22,000명이 돌아갔다. 결국 10,000명이 남았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군사들을 물가로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하라고 지시하셨다.
이 과정에서 물을 손으로 떠 입으로 마신 300명을 선택하셨고,
나머지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때 남은 자가 바로, ‘기드온의 300 용사’다.
나도 그 용사들 중의 한 사람처럼
돌아가지 않고 남은 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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