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닝 포인트
남편은 신학 과정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교회를 개척했다.
다른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그냥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늦깎이 목사가 된 남편은 묵묵히 그 길을 걸을 뿐이다.
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자립 상태다.
그러나 그는 유기농, 무공해 같은 말씀을 준비하여 강단을 지키고 있다.
십자가만 꽂아도 성도가 몰려오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건물마다 십자가가 꽂혀 있던 때에 남편이 목회를 시작했다.
별빛이나 가로등이 필요 없을 정도로
도심의 밤 풍경에 십자가 꽃이 만발하던 시절에
남편도 십자가 불빛 하나를 더 보탰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위 말하는 교회 부흥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은, <복 받는다, 잘 된다, 신비하다,라고 선포하는 교회>를 좋아하는데,
남편은 그런 건 입 밖에도 내지 않으니...
그냥, 하나님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하게 풀어주는 역할만 하는 목회자로
정년까지 죽 갈 모양이다. 중증 환자 아들을 돌보면서...
우리 교회 입구에 항상 신문이 꽂혀 있었다.
'사랑, 진실, 인간' 등 교회 정신을 담은 기독교 신문, 국민일보였다.
구독하지 않겠다고 메모를 붙이기도 하고, 신문을 그대로 쌓아두어도 소용없었다.
어느 날 신문을 집어 들고 후루룩 훑어보던 중이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짧게 서너 줄로 된 스트레이트 기사에 눈길이 꽂혔다.
그 짧은 기사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줄을 그땐 몰랐다.
그때 그 순간 그 기사를 보지 못했더라면
아무도 그 소중한 정보를 내게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알고리즘을 통하여 뉴스 피드가 떠오르는 때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사느라 그랬고,
결혼 이후 허겁지겁 삶에 쫓겨 지내느라
교직에 대한 생각이 없어졌다.
임용은 물 건너간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 캄캄한 의식 속에 한 줄기 빛 같은 뉴스 기사가
어쩌다, 어쩌다가, 내 눈에 띄었다.
내용은 나와 같은 미발령 교사에게 부전공 연수할 기회를 주고
임용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었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 1990년 이전 국립사대 졸업자 가운데 교사로 임용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이 제한 없이 중등교원 임용시험을 치르거나
교대에 편입한 뒤 초등교사로 임용되는 길이 열린다. [출처:중앙일보]
- 국립사대 졸업자들은 90년 10월 7일 이전에는
교원임용시험을 치르지 않고 공립학교 교사로 우선 임용됐다.
'졸업 후 교사 임용을 보장받고 사범대에 입학한 것'이었다.
또 교육대에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3학년 편입정원 2천89명을 배정,
이들이 초등교사로 임용될 기회를 제공할 방침이다.
다만 초등교원 임용시험 합격자는 도(道) 단위 농어촌 지역에서
2년간 의무 복무해야 한다. [출처:중앙일보]
‘미발추’(국립사범대학 졸업생 중 교원 미임용자를 완전히 모두
발령하기 위해 추진하는 위원회)라는 모임이
미발령 교사들의 임용을 위해 힘을 많이 썼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던 나는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올린 모양새다.
신문을 접어두고 부랴부랴 교육청에 연락했다.
미리 알기나 한 듯이 내 임용 관련 내신 서류는
내가 살고 있던 인천시 교육청에 있었다.
경남보다는 인천 쪽이 임용 티오가 많다는 소문에
하고 많은 도시 중에 인천에다 서류를 접수시켜 둔 상태였다.
이런 걸 보면 인생은 마치 복선 가득한 소설 같다.
공교롭게도 서류 준비하는 일이 한결 수월했다.
- 환갑 전에는 발령 날 거야. 나라가 하는 일인데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하겠지.
예언처럼, 희망처럼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적중했다.
내가 교단에 다시 설 것이라는 걸 마음에서 접고 살았는데 어머니 생각이 옳았다.
대학 졸업 당시와 달리 그즈음 교사 지위는 최고조였다.
교원 임용 고시 관문이 바늘구멍이었다.
‘그까짓 공무원’이라고 했던 20대 시절과는 상황이 달랐다.
새로운 역사가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1983년 2월에 졸업했으니
23년 만에 펼쳐지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40대 중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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