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향 2
어머니와 나는 여성용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걸어 다니면 기동력이 떨어졌다.
시장 안 점포에는 조그마한 하꼬방을 만들었다.
거기서 잠시 앉거나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윗마을에 있는 본가로 올라갔다.
그랬다가 새벽 일찍 시장으로 또 나가야 하니 성가셨다.
어머니를 설득하여 본가를 처분하고 장터에 상가를 얻자고 했다.
어머니는 장터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농사일을 겸했기 때문에
어머니로서는 본가를 처분할 생각이 없었다.
본가를 처분하고 방이 딸린 도로변 상가를 얻었다.
그날로 우리는 집 없는 신세가 되었다.
추억도 애환도 많았던 고향, 그 옛집을 그렇게 팔아 치웠다.
도로변 상가는 누가 봐도 그럴듯해 보였다.
시장 점포와 도로변 상가에 물건을 진열해 두 개의 가게를 운영했다.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시장 안 점포만 열었고 평일에는 상가를 열었다.
무싯날에도 시장 안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어서 판자때기 문짝 하나만 열어두었다.
그 점포 나무판에다 도로변 상가로 찾아오라는 안내문도 부착했다.
점점 무싯날에도 신발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신발 가게 보다 더 큰 사업이 있었으니 바로 연탄 대리점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연탄 주문을 받아 연탄 공장에 연락하면 연탄차가 왔다.
하루에 대형 연탄 차가 3~4대나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 연탄차 기사 옆에 앉아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주문받은 연탄을 배달했다.
주문했던 가정에서는 리어카로 연탄을 받으러 나오기도 했지만
마을 어귀에 연탄을 잔뜩 부렸다가 연탄차를 돌려보낸 후에
각 가정 연탄광에 우리가 연탄을 쌓아주곤 했다.
때로는 눈이나 비가 내리기도 했다.
그러면 한밤이라도 비상이 걸린 듯이 연탄을 부랴부랴 옮겨줘야 했다.
- 쯧쯧, 대학까지 나온 아가씨가.
등 뒤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여러 가지 일은 벌어져 있었고 동생들은 학업 중이니
그런 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흘려야 했다.
배달용 연탄집게로 연탄을 옮겨주는 일은 막노동 그 자체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은 이 일을 해냈다. 마치 여전사들처럼...
한 사람이 한 번에 4장씩 집어 옮기니 금방 일을 끝내곤 했다.
문제는 계단 있는 집이었다.
그런 때는 중간중간에 한 사람씩 서서 한 구간씩 연결하여 연탄을 옮겼다.
연탄을 많이 배달하고 나면 주먹이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손이 아팠다.
비렁뱅이 우상사도 연탄 배달을 도울 때가 있었다.
어머니는 땀을 닦고, 여동생은 콧물을 닦고, 우상사는 침을 닦고, 난 눈물을 닦았다.
연탄집게 잡았던 손으로...
그러면 우리 각자 얼굴에 깜장칠이 칠해졌다.
그랬지만 연탄 자국이 묻은 본인 얼굴을 자신은 보지 못하니
웃긴 줄도,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누에고치 실을 뽑는 제사 공장 같은 곳에서는 연탄을 한 트럭씩 주문했다.
그럴 때는 연탄차 기사들이 직접 옮겨 넣어주니 우리 손을 보태지 않아도 일이 끝났다.
대개 월동 준비로, 연탄 500장, 1,000장씩 주문했지만
살림이 빠듯한 집은 겨우 50장 정도만 주문했다.
연탄을 다 부리고 돌아갈 때는 트럭 기사에게 현찰을 쥐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소비자들에게 그 자리에서 돈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외상거래가 대부분이었다.
연탄 차가 들어오면 돈부터 준비해 두어야 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았지만 항상 돈을 둘러대야 하니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 같았다.
돈을 챙기는 일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내 청바지 주머니에 백만 원 정도의 현금을 지니고 있었다.
연탄 차에 맞춰줄 돈이었다.
내 주머니에는 쉼 없이 돈이 들어오고 나가곤 했다.
그렇지만 연탄 차에 챙겨 줄 돈은 늘 모자랐다.
그래서 걸핏하면 일수를 썼다.
일수는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당장에 백만 원이든, 이백만 원이든 융통할 수 있었다.
일수쟁이는 해거름 때쯤에 우리 점포에 왔다.
일수쟁이들은 당일치 일수를 챙겨 받으면
도장판에 도장 하나 달랑 찍어주고 유유히 사라지곤 했다.
어머니가 이용하는 일수쟁이는 서너 명이나 됐다.
그들이 차례로 들이닥치곤 했다.
때로는 일수를 갚으려고 일수를 낼 때도 있었다. 이른바 돌려 막기였다.
연탄 차를 타고 다니며 연탄 배달에 정신이 없을 때
중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던 김주사가 말했다.
- 생물과 처녀는 시가 넘으면 안 되는데…. OO양, 그러믄 안 된데이.
대학 나온 아가씨가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지.
그 꼴이 뭐꼬? 연탄 배달이나 하고...
‘아저씨가 우리한테 뭐 보태준 것 있습니꺼?’
라고 속으로는 외치고 있었지만, 실상은 말 한마디도 못했다.
아버지 없는 집안이라 스스로 기가 죽었다.
오빠가 있어도 집을 떠나 근무지에 있으니
김주사가 우리 집안을 얕잡아 보는 것 같았다.
김주사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우리 논도 넘겨다봤다.
여기저기 있던 논은 학자금에 보태느라 야금야금 다 팔아치우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논이었다.
- OO양, 여자가 농사는 무슨 농사고? 그 논 팔아라. 내가 값은 잘 쳐줄게.
만나기만 하면 졸라대는 김주사한테 결국 세정지 논, 열 마지기를 팔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 오빠가 결혼했다.
어머니는 한 해에 두 가지 대사를 치르셨다.
결혼식에 하객을 태울 대절 차를 예약하는 등, 결혼의 모든 절차를 혼자서 감당하시려니
너무나 버거우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아버지 장례는 의외로 잘 치러내더니 오빠 결혼식을 마친 후에는 혼이 날아가고 말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해녀의 숨비소리 같은 깊은 한숨을 습관처럼 쉬셨다.
어머니와 둘이 그 많은 일을 헤쳐 나가기가 힘이 들었는지?
내게 몇 번, 공황 증세가 왔다.
찾아오는 손님이 반갑지 않았고 돈도 싫었다.
숨이 가빠지면서 빙빙 돌았다.
그럴 때는 돈주머니도, 손님도 내팽개쳐 두고 일단 자리에 누워야만 했다.
윗마을로 올라가서 산과 하늘을 쳐다보며 잠깐 지내면 맘이 다소 안정되곤 했다.
이루지 못한 사랑앓이도 어느덧 가라앉을 즈음에 맞선 자리가 들어왔다.
결혼할까 말까 하는 맘으로 몇 밤을 보냈다.
맞선을 보고 결혼한다는 것은 배우자를 인위적으로 고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관과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외모에 자신 없는 내가 임용조차 받지 못한 미발령 교사인 것이 맘에 걸렸다.
내가 비혼주의로 살면 사람들은 떨거지로 생각할 것만 같았다.
결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으로 여길 것 같았다.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때라 그런 게 염려됐다.
- 한 번 만나보기만 하세요. 세상에 이런 남자는 없습니다.
중간에 소개하는 분의 끈질긴 부탁에 맞선 자리에 나갔다.
지인이었던 시누이 남편 소개로 만난 우리는 상호 신뢰는 깔려 있었다.
남자는 싱글벙글하며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여러 가지 사정상, 당일에 결혼 여부를 결정해야만 했다.
그럴 수도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게 가능했던 게 우리였다.
우리는 맞선 당일에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
어머니께 그 많은 일을 안겨 놓은 채 결혼하게 됐다.
오빠는 나보다 2년 먼저 가정을 이루었다.
부부 교사였던 오빠네 조카를 돌봐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일 구덩이 속에서 나만 빠져나온 셈이다.
- 그래도 다 때가 있는 기라.
나이 더 들기 전에, 짝 있을 때 결혼해야지.
집안일은 또 어찌 되겠지.
어머니는 나를 내보내고도 살 자신이 있으셨을까?
내 결혼 날짜가 정해지니 목화솜이불을 직접 만들어 주셨다.
인생에 밀려가듯 나는 결혼과 동시에 고향을 떠났다.
대신에 막내 여동생이 내가 하던 일을 이어받았다.
그 여동생은 사업가 기질이 있어 일 처리를 잘했다. 휴우, 다행이었다.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법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끄떡없이 잘 살아내셨다.
마흔아홉에 홀로 되신 어머니는 우리 오 남매 학업 뒷바라지를 다 끝내고 출가까지 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세 자매는 10개월 만에 차례대로 혼례를 올렸다.
어머니 회갑 파티에서 우리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가족사진을 한 방 찍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도,
인생이란 어찌어찌 굴러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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