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향 1
그때만 해도 취직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농협에서 심부름하던 사람이 그곳 직원이 되기도 했고
학교 소사로 있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행정실에 근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초, 중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도시로 나가 공장에 다니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 전업 주부로 사는 것이 다반사였다.
더구나 교사는 인기 있는 직종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현대건설, 동아건설, 이런 쪽에 취직되는 것을 출세로 여겼고
은행에 취업하면 대단한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나의 경우는, 국립사대를 나왔으니 교사 외에는 딱히 할 게 없었다.
그렇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사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내가 '상록수'에 나오는 채영신처럼, "지식인은 민중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람도 못 됐다.
다만 기득권을 놓쳤다는 것에서 털린 기분이었다.
대학까지 나왔는데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것에 스스로 주눅 들었다.
기약 없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일종의 형벌 같은 것이었다.
별로 할 일이 없었지만 굳이 막차를 타고 귀향했다.
본시 귀향이란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로 돌아가야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고향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때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과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모두 나를 쳐다보며 수군댈 것 같았다.
그랬지만 막상 고향에 도착해 보니 그런 생각은 사치였다.
곧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신발 가게, 연탄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아버지가 하시던 신문 보급소 일까지 하셨다.
게다가 농사일에, 아버지 병 수발까지 해야 하니 어머니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알고 보면 어머니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 자슥 뒷바라지는 한강의 자갈로도 감당 못 하겠데이.
- 발령이 날 끼다. 나라가 하는 일인데 설마 그대로 두겠나?
- 환갑 전에는 발령 날 것이니 넉넉하게 맘 묵으라.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어머니는 무척 낙심한 표정이었다.
- 자슥이 뭣일꼬? 땡전 한 푼까지 다 털어주고도 더 주고 싶더라 카이.
우리가 고향에 생활비를 받으러 가면 앞치마 주머니를 툴툴 털어 동전까지 다 쏟아 주셨던 어머니였다.
그렇게 우리를 뒷바라지했으니 기쁨의 단을 거두셔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매콤하게 어머니를 배반했다.
아버지는 간경화에다가 말기 식도암 진단까지 받았다.
식도암은 다른 암보다 더 빨리 끝장이 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으니... 아버지의 투병은 오래가지 않았다.
- 보 쳐놓고 물 못 대고...
고모의 통곡 소리는 너무나 구슬펐다.
그런데 어머니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나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엄마에게만 짐을 남겨두고 떠나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사범대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오빠는 곧바로 발령받았다.
오빠의 전공은 물리였다.
제2 외국어보다 과학 과목은 교원 적체 현상이 덜했다.
오빠가 첫 월급을 받던 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 아부지, 아부지~
꽃상여가 마을 어귀에서 너울너울 상여 춤을 출 때, 오빠는 오열했다.
오빠는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에 짓눌렸을 것이다.
- 니 오빠가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내가 정신 바짝 차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데이.
저렇게 든든한 아들이 있는데 내가 와 몬 살겠노?
내 자슥들 눈에서 눈물 나지 않게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어머니는 그렇게 정신을 차렸다.
귀향 후에 곧바로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고향에서 지내게 됐다.
‘우상사’라고 불리는 비렁뱅이가 아버지를 잘 따랐다.
아버지가 떠나셨지만 그와 함께 신문 보급소 일을 헤쳐나갔다.
- 큰 돌만 중요한 것이 아니데이, 자갈도 소중한 법이데이.
사람을 차별하믄 안 되는 기라. 인간은 다 평등한 법이다.
평소에 아버지가 우리에게 하던 말씀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우상사를 인간적으로 대해 주니 우상사는 아버지만 따랐고
아버지가 하는 말을 나라님 말씀으로 여길 정도였다.
우상사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자 우상사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울어댔다.
좋아하던 막걸리도 마다했다.
우상사는 새벽 첫 버스에서 신문 뭉치를 받는 일부터 했다.
시장통 난전에서 잠을 자는 우상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문 꾸러미를 받는 일을 해냈다.
우상사가 받아 놓은 신문 뭉치를 풀어 배달용, 발송용으로 정리했다.
명단을 보고 신문을 말아 띠지에 끼웠다. 그 띠지에 주소를 적었다.
우상사는 우체국에 가서 신문 꾸러미를 탁송했다.
배달부들은 띠지에 적힌 이름을 보지 않아도 어느 마을, 누가, 무슨, 신문을 구독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신문은 산 너머 마을까지 배달됐다.
우상사는 막걸리로 아침을 대신한 후 시장통에 사는 구독자들에게 신문을 배달했다.
우상사가 글을 읽을 줄 몰랐을 텐데, 한국일보, 동아일보를 구분하거니와
구독자 집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았다.
그런 걸 보면 본인이 군대에서 상사였다고 하는 말이 사실 일 것도 같았다.
신문 배달은 여축없었다. 배달 사고는 일절 나지 않았다.
내가 귀향했을 때, 막 교복 자율화가 확산되던 즈음이었다.
가마니 멍석에다 고무신 몇 켤레를 벌여놓고 장사를 시작했던 어머니는
조금씩 장사 규모가 커지니 아예 시장 안에 점포를 마련했다.
점포라 해봤자 판자대기를 댄 하꼬방이 딸린 난전 가게였다.
나무로 된 문짝 여러 개에 기둥을 받쳐 세워 문을 열었다가 밤이 되면 그 문짝을 내리는 방식이었다.
지금도 가끔 꿈에, 그 점포 안에서 장사하느라 정신없던 부모님 모습이 보인다.
고향을 생각하면 그곳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곳처럼 환하게 떠오르곤 한다.
신발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한 집에 보통 5~8남매를 키우던 시절이었다.
중저가 운동화를 너나 할 것 없이 사서 신었다.
명절이 되면 장사가 너무 잘 되어 정신없었다.
신발을 사겠다고 점포 앞에 몇 겹으로 사람들이 붐볐다.
외삼촌이나 친척들 몇 분을 세워 손님 정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 저 집은 갈퀴로 돈을 긁어모으네.
사람들은 그런 우리 가게를 보며 말하곤 했다.
그랬지만 5남매 모두 대학 공부를 시키려니 돈은 늘 부족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병구완으로
빚이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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