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황
집에 누가 찾아와도 뒷방에 숨었으며 선생님이 뭘 시킬까 봐 땅만 보며 살았다.
그런데도 그 시절에는, 공부만 잘하면 뭐든 잘하는 줄로 여겼다.
리더십이 없었는데도 내내 부급장을 맡아놓고 하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아쉽게도 여자는 급장이 될 수 없었다.
급장은 남자, 부급장은 여자로 정해져 있었다.
남존여비, 그게 극명하던 때였다.
그림 대회에 참가하거나 글짓기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곤 했다.
100m 달리기 선수도 하고, 릴레이를 할 때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고전 읽기 대회에 나가거나 연극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여러 가지 상을 타며 칭찬받는 학생으로 초등학교생활을 잘 보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내 성적에 관심을 보이셨다.
시험 날이 다가오면, 나는 동구 밖 가로등 밑에서 모든 교과서를 통째 외웠다.
서너 번 정도 정독한 후에 외우면 스펀지가 물 먹듯 기억이 머리에 저장되던 때였다.
첫 시험에서, 모든 과목을 통틀어 딱 한 개만 틀렸는데, 그게 물상 과목이었다.
시골 버스 정류장 안에 있었던 간이 서점에서
전과와 수련장, 문제지 등을 팔았는데, 어머니는 그곳을 샅샅이 둘러보셨다.
그런데 영어, 수학 문제지만 갖추어져 있을 뿐, 물상 문제지 같은 건 없었다.
어머니는 읍내까지 나가서 물상 문제지를 구해오셨다.
게다가 어머니는 매달 쌀 한 홉씩 1년간 모으는 장리 계에 가입하여
연말에 그 곗돈을 탈 수 있었다. 네모지고 트렌디한 노란색 손목시계를 사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닥다닥 5남매가 모두 책가방을 드는 학생이었는데도,
그렇게 문제지를 사다 주시고 시계를 장만해 주셨던 것이 어머니의 사랑 방식이었다.
또한 공부를 잘하라는 무언의 압력이기도 했다.
작은 시골이긴 했지만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중3 때였다. 선생님들이 당시 명문 여고에 나를 합격시키겠다고 합심하여 도와주셨다.
그분들 덕택으로 여고에 진학하긴 했지만, 사춘기를 심하게 앓아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교회 활동을 하거나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시간을 보냈다.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 국어, 영어, 수학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그 세 과목의 점수 배점이 다른 과목의 5배였다.
그래서 전 과목 합산한 성적은 바닥을 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래에 대한 꿈도 희망도 없었다.
고향 친구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면 공장으로 가던 시절이었다.
고향 천지에서 외지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여자는 내가 최초였다.
부모님은 우리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없었고 삶에만 골몰하셨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버는 것보다는 공부하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을 은연중에 우리에게 심어주셨다.
- 공부해야 고생 안 하고 산데이.
- 공부해야 농사꾼이 안 된데이.
- 니는 키 작고 못생겼으니, 공부 안 하믄 아무도 안 데려 간데이.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고 다투셨다.
아버지는 자식 공부 뒷바라지에 큰 애착이 없으셨다.
어머니가 하자는 대로 마지못해 따라가긴 하셨지만, 인생을 포기한 자처럼 술로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가 날마다 기생집에 드나드시니 어머니의 악다구니는 점점 거칠어지셨다.
그런 집안에서 사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끝장날 것만 같았다.
가정불화 때문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조용하고 정겹게 사는 집을 보면 무척 부러웠다.
우리 형제들은 자존감이 바닥이었고 미래를 꿈꿀 힘조차 없었다.
여고 3학년 때, 학급 내 친구들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하는 분위기였다.
대학은 가야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진로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여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학급에서 상위 다섯 명을
국립 대학교 교육 인문 계열(사범대학)에 원서를 접수시켰다.
그런가 보다, 라며 본고사를 봤다.
마치 무언가에 그냥 떠밀려 가는 격이었다.
본고사를 국, 영, 수 세 과목만 봤으니 그것은 내게 유리한 관문이었다.
예비고사 성적이 별로였지만 본고사 성적에서 만회되어 겨우 대학에 합격했다.
대학 2학년 때, 전공과목을 결정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불어를 배웠고
불어 시험은 늘 만점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생각도 없이 불어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것이 훗날 내 발목을 잡을 줄 미처 몰랐다.
졸업 즈음에 ‘미발령’이라는 말이 들렸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였다.
‘교원 적체 현상’이라는 시대가 내 앞에 도래했다.
국립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자동으로 발령이 나는 게 법인데 우리 때부터 그 길이 막혔다.
졸업하면 교사가 될 것이고 그럭저럭 인생을 살 작정이었는데
출구가 꽉 막힌 막장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보다 어머니 절망이 더 컸다.
빚을 지면서 딸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주신 어머니는
졸업만 시켜놓으면 남부끄럽지 않은 자리에서 잘 살 것이라고 믿었다.
- 딸내미를 대학까지 공부시켜?
- 다 남 좋은 일 시키는 거지.
- 딸은 적당히 가르친 후에 결혼만 잘하면 끝이지.
-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야.
- 남자 하나 잘 물면 여자는 장땡인 기라.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하는 별의별 소리를 등 뒤에서 들어가며 우리를 공부시키셨다.
그런데 미발령이라 하니, 어머니의 한숨은 깊어지셨다.
여고를 졸업하여 대학 입시에 떨어진 친구 중에는
곧바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당시에 2년제였던 교대에 진학했다.
어떤 친구는 간호전문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국립 사범대를 졸업한 나는 오히려 어정쩡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나의 방황이 시작됐다.
무작정 발령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 달, 6개월, 1년…. 발령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동생들이 학교에 다니느라 얻어놓은 자취방에 얹혀있기도 뭣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된 친구들의 자취방을 찾아갔다.
친구들은 나의 방문을 환대했다.
그들은 대부분 섬이나 벽지에 첫 발령이 나 있었다.
국어나 영어 과목은 당해에 발령이 났다.
다만 제2 외국어는 티오가 없으니 발령이 나지 않았다.
신입생을 모집할 때 졸업생들이 나갈 자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했던 정책이 화근이었다.
실험대학이라는 것으로 계열 입학 후에 학과 선택을 하게 하니
일부 학과족으로만 몰려 어떤 교과는 존폐 위기에 놓였다.
- 2월은 가장 어정쩡한 달
그때 읽었던 시 한 구절이 내 맘을 후벼 팠다.
그해 2월은 내게도 참 어정쩡한 달이었다.
방황하며 1년을 보낸 그 끄트머리, 2월이었다.
사랑마저 떠나갔던 달이다.
교사로 발령이 나지 않으니 남자친구도 나를 대하는 눈빛이 달라지는 듯했다.
나를 평가절하하는 것 같았다.
나 혼자 했던 오산이었겠지만, 그 사랑을 끝내버리고 싶었다.
이리저리 요령을 부려 헤어지는 단계까지 가도록 조용히 사랑을 조종했다.
방황하던 내게 고향에서 연락이 왔다.
술을 좋아했던 아버지가 결국 간경화 진단을 받으셨다.
아버지 상태가 좋지 않으니 귀향하라는 어머니의 연락이 왔다.
어머니는, 내가 타향에서 할 일 없이 무위도식할지언정
귀향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교사로 발령받은 후에 고향에 오기를 내심 바랐을 것이다.
숨 막히게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나더러 고향에 오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갈 데까지 가버린 집안 사정이라
낙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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