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년의 뜰 3
그즈음부터 아버지는, 걸핏하면 '가시나집'(기생집을 그렇게 불렀다),
'한일관'이나 '천일관'을 들락거렸다.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로 들여다본 가시나집은 요지경이었다.
뽀글뽀글 파마를 한 여자들은 입술도, 손톱도 빨갰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깔깔대는 여자들 웃음소리가 탱자 향과 함께 장터에 퍼지곤 했다.
더러는 젓가락을 양손에 쥐고 술상에 '딴딴따따단, 딴딴따따단'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필 내 청춘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부기부기 부기우기
부기부기 부기우기 기타 부기
흥에 겨운 노랫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더라도
어머니는 족집게처럼 아버지가 어느 가시나집에 있는지 알아냈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촉이 밝았다. 마치 전직 형사 같았다.
"미친 연놈들, 내가 팍 ×여 뿌린다."
어머니는 수사반장처럼 의기양양하게 가시나집 미닫이를 홱 열곤 했다.
방안에서 여자와 엉겨 있던 아버지는 만취되어 인사불성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숨바꼭질하다가 술래에게 들킨 모양새로 가시나 집을 빠져나오곤 했다.
어머니가 전날 저녁에 무쇠 숯다리미로 날을 세워 다림질했던 아버지의 바지는 너덜너덜했다.
아버지는 허리띠를 제대로 매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며 자전거를 끌고 윗마을로 향했다.
어머니는 술래잡기하듯 아버지를 쫓으며 본가가 있는 윗마을로 올라갔다.
부모님의 '숨고, 찾기'는 끝없는 놀음이었다.
죽여라, 죽겠다, 고래고래 고함 소리가 어둠에 졸고 있는 마을을 깨웠다.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해두고 술집에서 놀고만 있는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가 퍼붓던 욕은 몇 톤은 될 듯했다.
어머니 입에서 분출됐던 욕설이 분수처럼 튀어
앞산이나 개울물에 흩뿌려지지 않았나 모르겠다.
"그걸 싹둑 잘라 뿌리야 내가 살지, 이러고는 내가 몬 산데이. 내가 당장 술약을 먹여 버릴 끼다."라며
어머니는 악에 받쳐 표독스럽게 욕을 해댔다.
술약이 도대체 뭘까?
술 먹는 자에게 먹이면 죽는 약일까?
명탐정 같던 어머니였지만 아버지가 숨은 곳을 알지 못했던 사각지대가 있었다.
내가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아버지가 윤금네 외숙모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다.
윤금네 외숙모는 틈만 나면 우리 가게 앞에 와서 아슬랑댔다.
얼굴에 뽀얗게 분칠 한 채 껌을 씹던 윤금네 외숙모는 여염집 여자와는 달랐다.
그녀는 월남치마를 살랑살랑 살랑거리며 굽 높은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윤금네 외숙모는 아무 남자에게나 반말을 해대며 눈웃음을 쳤다.
아버지가 윤금네 집에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았더라면
윤금네 외숙모는 우세를 당했을 것이며
대낮에 얼굴 들고는 살지 못했을 것이다.
여하튼, 멈추지 않는 국지전처럼, 부모님의 싸움을 매일 봐야만 하던 나날이었다.
"싸리채 꺾으러 갈래?"
어느 날, 후남이가 말했다.
후남이는 매일 싸리채를 꺾으러 다녔다.
걔는 어머니와 함께 싸리채를 꺾어 껍질을 벗긴 후에 장에 내다 팔았다.
싸리채 껍질을 벗기지 않은 통대는 발, 삼태기, 싸리문, 등을 만드는 데 쓰지만
껍질을 벗긴 속대는 광주리, 채반, 다래끼 등을 만들었다.
싸리채 껍질을 비사리라고 했는데 그것도 쓸모가 있었다.
'비사리 끄릉텡이'라는 삼태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 껍질을 벗기려면 꼬챙이 두 개 사이에 싸리채를 넣고 훑어야 했다.
나도 후남이를 따라 싸리채를 꺾으러 갔다.
하얗게 껍질을 벗긴 속대를 다발로 묶어 시장에 가져가면
서로 사겠다고 나래비를 섰다.
성질 급한 이들은 장터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와서 미리 싸리채 다발을 선점하기도 했다.
아무 밑천 없이 산에 가서 꺾었던 싸리채로 돈을 벌었던 날, 잠이 오지 않았다.
매일 싸리채를 꺾어 팔아 돈을 벌어볼까 하는
솔깃한 생각이 들었던 밤이다.
그것을 팔아 딴 주머니를 찰 수 있었다.
내가 풀빵을 먹고 싶을 때면 몰래 사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몰래 먹는 풀빵은 뜨겁기만 했다.
무슨 맛인지 모를 판이었다.
어물쩍 넘겨버려야 들키지 않으니 말이다.
싸리채를 팔아서 풀빵을 사 먹어 본 후에,
돈이 있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싸리채를 팔아 난생처음으로 돈이란 걸 벌어 봤다.
돈 벌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부모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장터에서 지지고 볶듯 다퉜다.
윗마을 본가에서도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싸움질이었다.
내가 봤을 때 어머니가 더 심했다. (이걸 보면 나는 대문자 T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욕먹을 일을 그만두지 않으셨으니
두 분 모두 도긴개긴이었다. (평가, 판단 본능)
어머니의 자식 교육열 속도는, 백 미터를 10초에 달린다면 아버지는 100초 정도로 더뎠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더 빨리'라고 채근하니
아버지는 자꾸만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가시나집이나 윤금네 외숙모였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도망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말하자면 성인군자 같은 자에게 야전 군사처럼 살라고 요구하는 짝이었다.
지금도 고향, 그 옛집을 생각하면 물건을 내던지고 서로 고함을 지르며 싸우던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숨 쉴 틈 없이 바빴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신문 보급소를 운영했던 아버지는 한나절이 지나면
사람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술을 부르고 정신이 없어지는 지경까지 갔다.
아버지는 세상에 다시없을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하다가
오후가 되면 술에 절고 가시나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딴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아버지 일상 루틴이었다.
아버지의 두 얼굴은 양극이었다.
새벽에는 마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휘파람을 불며 장터로 출근했던 분이
저녁에는 고주망태가 되니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윗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가 자전거 찌르릉 소리를 동구밖에서 울리면
우린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마루에 일렬로 나란히 서서,
"아부지, 다녀오셨습니까?"라고 진심 어린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바로 잠드는 아버지가 혹시 깰까 봐 발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부모님이 큰 소리로 다투니 동네에 고개를 들고 다니기가 뭣했다.
내 뒤에서 모두들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집안은 불안하고 두려운 곳이었고 집 밖은 부끄럽고 창피한 곳이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이런 생각도 종종 했다.
사는 게 생지옥이었다.
그 시절 유일하게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있었으니,
마을 어귀, 둥천에 있던 아름드리 버드나무 아래서 친구들과 했던 학교 놀이다.
정자나무 아래 빙 돌아가며 둥그렇게 만든 시멘트 의자에서
어른들은 장기를 두거나 낮잠을 잤다.
어떤 애들은 나무 타기나 술래잡기를 했다.
더러는 오징어 게임이나 비석 치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은 학교 놀이에 진심이었다.
그때 나는 주로 선생님 역을 맡았다.
나는 똑 부러지고 무서운 선생님의 성대모사를 잘했다.
"와, 진짜 정말 똑같다. 호랑이 샘, 박 선생님이랑 판박이데이.
"이담에 니는, 선생님 해라."
"맞다. 니는, 딱 선생님이다."
"니는, 선생 하면 잘 할기다. "
학교 놀이를 하다가
나의 정체성이 태동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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