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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이 시대의 어른 김장하

내가 번 돈은 내 것이 아니다.

by Lablife

넷플릭스로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이자 영화를 접했다.
거기서 알게 된 김장하 선생님의 삶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재산의 99% 기부하고 떠날 거라고 했던
마크주커버그, 워렌버핏의 말에도 나는
“그래 1%여도 엄청날 테니까. 99%를
기부해도 괜찮겠지”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의 기부행위는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그에 비해 김장하 선생님의 이야기는 전혀
나에게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img.png 당시 100억대 사립 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것에 대한 신문기사_어른 김장하 다큐


-나이 24살부터 학생들에게 학비 지원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사립고 설립
학교 설립 과정에서 자신의 재산 처분하여 자금 마련
-설립 후 8년 뒤 나라에 학교 헌납_당시 가치 100억대


김장하 선생님의 장학생이 몇 명인지
빌려준 금액대는 얼마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을 받을 땐 직접 김장하 선생님이 운영하는
한약방에 찾아가 받았고
그 자리에서 돈을 세어 주셨을 뿐
장부에 기록하거나 하는 과정은 일절 없었다.

단 한 번도 언론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고
관련된 질문을 할 때마다 입을 꾹 닫으셨다고 한다.
다큐 '어른 김장하'도 선생님의 인터뷰 없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그의 장학생들조차 김장하 선생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할 때면 아무도 믿지 못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며.

진주에서 한약방을 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보이지만 진주에선 이미 꽤 유명했던 것 같다.

김주환 기자가 쓴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책을 보면
다큐에선 다 담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미 진주에서 유명했던 그에게 돈을 얻으러 온
사람이 참 많았던 듯싶다.

대학 동아리 사이에서도 동아리 활동을 위해
돈이 필요하면 김장하 선생님을 찾아갔다고 한다.
심지어 전국 일주를 하고 싶다며 돈을 얻으러 온
학생부터 (이 학생에겐 돈을 주지 않았다고 함)
정치 자금을 위해 온 정치인까지
(정치활동 자금에도 돈을 대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장하 선생님은 진주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미 여겨지고 있었던 듯싶다.

그의 손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그의 자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 꽤 많은데
어디서부터 그가 손을 댔고 대지 않았는지 알 겨를이
없다고 한다. 왜냐, 선생님이 절대 얘기하지 않으므로

-그의 자금으로 운영되었던 진주 신문
-가정폭력 피해 여성 보호시설 설립 기금 제공
-극단 현장 소극장 후원
-역사 인물 후원 후원
-형평 운동운동 기념사업회 이사장

진주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굉장히 많은 영역에
기부활동을 했지만 알려진 바는 이 정도뿐이다.

자신이 한 선행을 내세우려 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며 보상을 기대하지도 않는 등
확실한 원칙을 보여준다.


특히 ‘장학금'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보통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근데 그의 장학금에는 특별한 원칙이 있다.
성적을 따지지 않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준다는 원칙이다.

물론 그 장학금을 받고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고
또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탄핵 재판으로 신문에 자주 거론되는
문형배 헌법재판관 또한 김장하의 장학생이다.

img.jpg 김장하 선생님의 생신연에서


책 [기브 앤 테이크]라는 책을 보면 먼저 줘야,
그다음 얻는 게 있다는 얘기를 담고 있는데
김장하 선생님의 삶은 완전 정반대다.
기브만 있고 테이크가 없다.

장학생들이 기억 속에 김장하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조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필요한 게 있다면
지원해 줬을 뿐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한 장학생이 김장하 선생님의 마지막 은퇴식에 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선생님의 장학금을 받고도 훌륭한 인물이
못되어 죄송합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그런 걸 바란게 아니다. 이 세상은
평범한 사람이 지탱한다.”

7aca1853-d0bb-4c6d-b3e8-2a4e31e0b248.png 어른 김장하 _ 다큐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서 어느 날 머리를 밀고 스님이
되어 나타난 장학생부터
군부독재 시절 옥살이를 한 학생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있지만 그건 그저 그들의 삶일 뿐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그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줄 뿐이었다.

나는 내가 모았기에 영원한 내 재물이다라는
관념보다는 이 사회나 국가의 재물을 잠시
위탁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사회로
환원하기로 결심한 거지요.”


돈이 많아서 부릴 수 있는 사치 아닌가?
라고 다큐만 봤을 땐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남은 돈으로 자신의 삶을 즐길 땐 즐기겠지,
이렇게 생각했다.

너무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김장하 선생님은 약 60년을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주 6일 근무에 대해 약속시간을 저버린 적이
없다고 한다.

한참을 앉아 있어도 이따금 ’ 약 찾으러 ‘오는
사람이 두엇 있을 뿐인데도 선생께선
여전히 흰 와이셔츠에 단정한 넥타이
차림으로 자리를 지킬 뿐이다.
무려 60년이다.

815724_491277_188.jpg 한결같이 이 자리를 60년 동안 지켰다.


직원들이 7일씩 여름휴가를 가도 선생님은 항상
그 자리를 지켰다.

비행기는 딱 1번 타봤는데, 이복형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갔던 평양행 비행기였다.

선생님은 평생 차 없이 생활했다.
한약방 화장실은 2021년 문을 닫기 전까지
푸세식 화장실이었고 할머니의 다리가
아파 더 이상 계단을 오르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약방 3층 엘리베이터 없는 집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학교를 헌납하며 이사장직에서 내려올 때,
사모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섭섭할 것 하나도 없다. 우리 둘이 만날 때 빈손으로 만났잖아.

지금 이거 내버려도 우리 먹고살 만큼은 남아 있고,

빚진 게 하나도 없는데 뭘 서운할 게 있나”

어른 김장하의 삶을 엿보며
나는 가진 게 얼마나 많은 사람인가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굉장한 욕심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 가족 형제 모두 건강고
든든한 신랑도 있다.

그런데도 왜 남들보다 못 사는지,
왜 나는 부모님을 비행기 타고 모시며
좋은 곳으로 여행을 못 가는지,
나는 왜 비즈니스 클래스를 탈 형편이 안되는지,
생각하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을 자식에게
충분한 재산은 물려줄 수 있을지,

전전 긍긍하며 살아왔다.

다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데,
왜 필요 이상의 많은 것을 탐내고 또 나눌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왔던 삶에 대해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지금이라도 어른 김장하의 삶을 엿볼 수 있어
너무나 다행이다.

이 시대의 어른, 김장하 선생님.
그의 삶을 엿볼 수 있게 다큐와 책으로 기록을 남겨주신
김주환 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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