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경기 중 - 탈피 脫皮 [다섯 번째 이야기]
엄마도 부모로 살기는 처음이라 많이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비단 우리 부모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부모님의 중대한 혼란 거리일 것이라 생각한다.
내 주위의 친구들 중 대부분은 학창 시절에 그들 부모의 뜻대로 자라나지 않았다. 우리는 유사한 형태를 갖춘 같은 종(種)이지만, 저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제각각의 개성이 부여되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을 입맛대로 바꿀 수는 없다. 혹여나 바꾸기 위해 강압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온당치 못한 모습이다. 하지만 부모는 ‘나는 내 아이를 ~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십수 년, 어쩌면 그 이상을 살아왔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방향에 맞게 잘 따라오기도 하니 ‘이대로만 키우면 정말 이상적인 모습으로 키워낼 수 있겠다.’며 안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춘기는 바로 그때 부모의 당찬 계획을 보기 좋게 무시하며 불현듯 찾아온다.
내가 지켜본 사춘기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다. ‘발산형 사춘기’와 ‘은둔형 사춘기’라고 이름 짓겠다. 사춘기가 올 법한 시기에 발산형과 은둔형 성격 모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봄바람에 실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느낄 수 없는 찬 기운과 같이 사근사근한 사춘기를 보내는 중일 거다. 이처럼 복이 넘치는 가정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보통의 경우 앞서 이름 지었던 두 형태 중 하나가 나타난다. 나의 경우는 ‘발산형 사춘기’에 속했는데, 정말 말 그대로 속에 쌓인 것을 모두 분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누군가가 나의 심기를 건들면, 감정을 정리하거나 인내하는 과정 없이 날이 선 모습으로 대응했고, 설령 나를 불편하게 한 대상이 부모이더라도 매우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성별을 막론하고 이렇게 나와 같이 ‘발산형 사춘기’를 겪는 중학생은 야생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상적인 사람의 상식으로 케어하기는 매우 힘들다.
한편 ‘은둔형 사춘기’를 겪는 아이는 발산형과는 반대로 부모만 애가 닳는 형상을 만들어낸다. 이 유형에 속하는 아이들은 마치 삶에 큰 권태를 느끼는 것처럼 비추어진다. 매우 조용해지고,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다. 이 아이들이 중대한 사고를 친다거나, 날 선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는 적지만 아이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어른의 입장에서는 매우 답답하게 다가올 것이다.
아이가 사춘기를 겪기 전에는 제법 말이 통하기도 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사춘기는 아이가 평생을 함께 한 양육자를 스스로에게서 박리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양육자의 사랑이 당연한 나머지 질려서’,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느껴서’, ‘나의 혼란은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 부모 역시 나의 고민에 관한 해답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해서’...... 여러 이유들이 아이의 머릿속에 자리한다. 아이 임의로 이런 사고 과정을 거쳐 임의의 판단을 내려버렸다면 소통은 매우 힘들다. 부모가 다가오는 상황 자체가 버거운 아이와, 아이를 이해하려 해 보지만 계속해서 난관에 부딪히는 부모 양측은 엄청난 답답함을 느낀다.
해법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걸까? 이러한 상황에 막상 닥치면 부모 역시 강한 혼란과 답답함에 휩싸여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 혹자는 엇나가는 아이만을 탓하기도 하는데,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사춘기로 인한 가정 내의 갈등은 결코 부모나 자식 한쪽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되는 일시적인 마찰일 뿐이다. 영원한 갈등이 아니기에, 갈등을 겪는 양측이 피붙이이기에, 나는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제시할 해법들은 내가 사춘기를 겪을 때 바랐고 꿈꾸었던 우리 집의 모습이기도 했고, 그때 당시 친구들과 반에 도란도란 모여 각자의 가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들의 불만 속에도 녹아있던 바람이었다. 첫 발을 떼는 일은 어려울 수 있지만 용기 내어 시도해보았으면 좋겠다.
진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용기
그 시기에 아이들이 친구에 죽고 못 사는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유’ 때문이다. 집에서는 쉽게 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친구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욕을 섞어가며 친근함이 잔뜩 배인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완벽히 배제한 채 이성에 관한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다. 당연히 공부를 강요받지도 않는다. 몇몇 바보들은 친구들과 동네 편의점을 떠돌며 이른바 ‘담배 뚫기’를 시도하기도 하고, 아무도 오지 않을 법한 수풀이나 지하주차장 진입로에 숨어 담배 한 까치를 나누어 태우며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기도 한다. 집 밖에 나와야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 친구들과의 어울림은 필수이고, 방황은 옵션이다.
하지만 나는 부모도 자녀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이가 같아야지만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편한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고, 무언가를 같이 즐길 수 있으면 그것이 친구의 전부다. 이럴 때면 지나치게 위계에 목을 매는 유교문화와 가부장제 문화에서 탈출하지 못한 우리나라 문화의 단면이 드러나는 것 같아 사뭇 아쉽다.
힘든 사춘기를 겪었던 내 친구들 중 대부분은 밤늦게 귀가하시는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자라거나, 도를 넘은 가정 내의 압박이나 간섭을 피해 도망을 나온 아이들이었다. 집에 늦게 들어갈 때마다 베란다에 갇혀 골프채로 온 몸에 피멍이 서릴 때까지 맞았던 내 친구는 7년 여가 지난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 가장 행복해야 할 공간에 정적만이 흐르고, 자기가 꺼리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그들의 삶은 기구한 숙명에 가깝다.
시간이 허락지 않더라도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할애하여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을 집안에서 원하는 볼륨으로 틀고 흥얼거릴 수 있도록 해 주고, 아빠와 아들이 땀에 흥건히 젖은 몸을 비비며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공을 차고, 아이돌 콘서트 티켓 예매를 도와주면서 딸이 느낄 쫄깃한 긴장감을 공유해보는 것이다. 자녀가 만나는 이성친구에 대해 궁금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내 아이의 여자 친구, 내 아이의 남자 친구라는 생각보다는 친구의 제수씨나 형수님이라 생각하고 그 사람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조금은 조심스레 생각하는 모습도 아이들이 사춘기를 극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땐, 부모로서 솔직하기보다, 친구로서 솔직하게 다가갔으면 좋겠다. 부모의 입장에서 하는 조언도 좋지만 본인의 유년기를 떠올리며 중학생 때의 ‘나’로 빙의해 나의 분신에게 다가가는 느낌으로 말이다. 절대 쉽지는 않겠지만 하나하나씩 차근히 해나가면 충분히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집을 아이에게 오롯이 내어주는 용기
우리는 가정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아이들이 ‘사람으로서 보장받아야만 하는 자유’를 침해당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가끔 고민을 공유하는 TV 프로그램에는 집에 들어오면 휴대폰을 압수당하고, 언제나 방 문을 열어놓아야 하며, 심지어는 친구들과 나눈 메신저 대화 내용까지 부모에게 검사 맡아야 하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집안의 압박은 분명 그들의 학교 생활과 인간관계 전반에 걸쳐 좋지 않은 영향들을 끼칠 수 있다.
뒷장[Chapter 4. 방육자, 교육자, 사육자의 모호한 경계]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교육이 사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커스 공연을 하는 코끼리가 핍박을 이기지 못한 채 자신을 거두어주던 사육사를 밟아 뭉개 죽이고 탈출을 감행하듯, 피양육자가 반항을 결심하면 그 결과는 실로 참담하다.
집은 자유가 보장되는 가장 편한 공간이어야만 한다. 일부 부모님들은 ‘아이가 혹여나 방 안에서 혼자 음란한 매체를 접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 탓에 방문을 닫는 것을 통제한다. 또한 ‘친구들과 모여 불량한 행동을 일삼지는 않을까?’하는 의심 때문에 휴대폰을 검열하며 아이들의 사생활을 침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덕적인 기준에 관한 교육과 바른 성관념을 가르치는 일은 아이가 더 어릴 때 선행되었어야 했다. 아주 어릴 때 가정교육을 통해 머릿속에 고착된 도덕관념과 성관념은 외부의 자극이 개입되어도 쉽사리 흔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사춘기 자녀를 믿지 못하는 부모의 의심과 통제는 ‘자녀가 어렸을 때 특정 사항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하지 못한 본인에 대한 후회’가 잘못된 방식으로 발현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사춘기 아이가 집을 가장 편한 공간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부모 본인이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행했던 교육에 대한 확신을 갖고 아이를 믿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가 믿는 만큼 자란다’라는 말처럼, 아이를 향한 부모의 신뢰는 곧 그들이 보다 자유롭고 편한 가정에서 지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아이는 본인에게 자유를 보장해주는 부모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자유에 따르는 책임감 역시 함양해 나갈 수 있다.
강렬하고 짧은 훈육
앞서 언급했듯 사춘기는 아이가 가정교육에 대해 권태를 느끼는 시기일 수 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짧고 잦은 훈육에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았을 테지만 본인이 성인이 된 줄 굳게 믿고 있는 사춘기 아이들은 부모의 잔소리와 잦은 간섭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다. 이제는 작전을 바꿔야 한다. 다른 방식의 훈육이 필요하다. 잘못을 목격하고 즉각적이고 빈번히 반응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보이는 잘못에 따끔히 지적하는 게 좋다. 매일 짜증을 내고 인상을 쓰는 친구가 화를 내는 것보다 항상 웃고 서글서글한 친구가 화를 내는 것이 몇 곱절은 무서운 것처럼 짧고 강한 훈육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지적을 했다면 다음 단계는 관계 회복이다. 부모는 아이가 저지른 잘못의 경중을 정확히 판단하여, 훈육으로 인해 서먹해진 관계를 복구하는 데 걸리는 기간을 조절할 수 있다. 아이가 스스로 반성할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될 정도로 중한 잘못(학교폭력, 절도, 어른에 대한 과한 불손 etc..)을 했다면 부모의 판단 하에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보름 정도까지도 관계 회복을 늦출 수 있다. 아이는 그 시기에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끼며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되고 이 시기는 곧 아이가 인성을 함양하는 데에 좋은 양분이 된다.
하지만 따끔히 이야기한 것만으로 충분한 ‘약한’ 잘못이었다고 판단이 서면 빠르게 회복할수록 좋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이 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아이는 집에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또한 아이가 ‘이런 잘못으로 이렇게까지 내가 눈치를 보아야 하나’라는 삐뚤어진 생각을 하게 되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아이와 부모는 ‘훈육이 필요했던 아이의 잘못’과 ‘부모의 훈육’ 이외의 ‘제3의 요인’(다른 잘못까지 꼬집는 부모의 반복적인 잔소리,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는 아이의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이 불손함으로 간주되는 불상사 etc..)으로 새로운 갈등의 골을 파게 될 수도 있으므로 이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