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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준혁 Jun 03. 2021

갑작스런 아빠의 등장

Chapter 1. 경기의 시작 - 탄생 誕生 [네 번째 이야기]

- 갑작스런 아빠의 등장


 내가 두 살 때 부모님께서 시작하셨던 갈빗집이 점차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할머니만 알고 살던 나에게 새로운 어른이 나타났다. 아빠를 나의 편이라고 생각한 것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네 살 정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집 앞 공원에서, 내가 안장에 ‘808’이라고 쓰인 세발자전거를 타고 옆에서는 아빠가 조깅을 하던 장면이 유독 선명히 기억나는데 내가 그 때 네 살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상대와의 첫만남이나 첫 장면을 오래 기억하는 것처럼, 내가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아빠와 나눴던 거의 최초의 긴밀한 교감, 또는 스스로 아빠를 나의 사람으로 받아들였던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림1-1]에 표시해둔 대로, 할머니와 아빠가 '나의 사람'으로서 공존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 시점 A를 지나면서 나는 어른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을 겪었다. 할머니와 아빠의 성향 차이로부터 온 어지러움은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순하고 연하기만 하던 할머니의 치마폭 안에서 평화롭게 살던 나였지만, 갑자기 가까워진 아빠는 마치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내 과거를 질책이라도 하듯 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아빠는 내가 굳고 강한 '남자'가 되기를 원하는 듯했고, 나이에 맞는 어린이로 자라기보다는 어떤 방면에서든 또래보다 한발 앞서가는 아들로 키우고 싶어했다. 


 아빠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날부터, 할머니와 함께했던 공부 시간은 사라졌다. 그 전에는 유치원을 다녀오면 할머니에게 그날 있었던 일이나 느꼈던 감정을 쪼잘댈 시간이 있었다면, 아빠가 나의 교육을 담당한 후부터는 그런 소소한 즐거움의 시간이 허용되지 않았다. 아빠의 교육은, 내가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오늘 저녁에도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라는 의무감 때문에 좀처럼 집에 들어가기 싫은 마음이 들게 만들기도 했다. 


 “오늘도 준혁이 잘했어요! 하나, 둘, 셋, 효도하겠습니다!”
  어린이집 버스에서 선생님이 내 손을 잡아 내려준 다음 맞배꼽인사를 마치면 나는 할머니의 손에 넘겨졌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할머니에게 일방적으로 대화를 걸었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종일 재잘댈 내용을 이제는 한 시간도 안 되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 안에 다 밀어넣어야 한다. 집에서는 아빠와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 요약의 중요성을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신없이 할머니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보면, 나는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아빠의 품에 격하게 안긴다. 아빠는 나에게 뽀뽀를 퍼부어대고, 나도 덩달아 아빠의 푹신한 배 위에 올라가 엉덩방아를 찧어댔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까실까실한 수염이 내 얼굴에 닿는 순간에도, 트램펄린 같던 배 위에서 콩콩 뛰던 그 순간에도, 샤워를 마치고 아빠와 마주 앉아 공부를 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게 오길 바랐다. 그러니까 나는, 아빠를 사랑했지만 그와의 공부를 싫어했을 뿐이었다.


 씻은 후의 개운함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나는 쇼파 옆에 딸린 작은 스툴을 책상 삼아 아빠와 공부를 시작했다. 그 '스툴'이 바로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학교다. 할머니와는 내가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의 기초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면, 아빠와는 내가 그동안 배우고 익혔던 앎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고 응용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빠는 할머니보다 가방끈이 긴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 좀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교육자가 대졸자로 바뀐 것은 ‘학업’이라는 요소만 놓고 내 유년기를 돌아볼 때 잘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깊이가 더 깊다고 해서 교육 방식까지 더 나은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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