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라는 환상

11화

by 이민주

나는 한동안 전문가라는 말에 기대어 일했다. 경험이 쌓이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길 거라고 믿었다. 질문받지 않아도 되는 위치,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는 자리가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꽤 오래 흔들리지 않았다. 전문가는 여전히 전문가였고, 사람들은 전문가의 말을 따랐다.


설명은 부연에 가까웠고, 결정은 위에서 내려왔다. “전문 가니까”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 말은 의심받지 않았고, 질문을 차단하는 힘을 가졌다. 나 역시 그 구조 안에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보호받고 있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하지만 AI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 구조는 빠르게 무너졌다. 정보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고, 정답을 빠르게 말하는 능력은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전문가라는 위치는 생각보다 허약했다.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자리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문가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떤 근거가 있는지, 다른 선택지는 없는지 묻는다. 질문이 많아졌다는 건 불신이 아니라 기준이 바뀌었다는 신호다. 예전에는 권위가 설명을 대신했다면, 지금은 설명이 권위를 대신한다. 그리고 그 설명은 피할 수 없는 요구가 되었다.


AI는 이 변화를 가속시켰다. 누구나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비교할 수 있고, 반박할 수 있게 되었다. 전문가의 말은 최종 답이 아니라 여러 의견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변화 앞에서 많은 전문직들이 혼란을 겪는다. 권위를 잃었다는 느낌, 자리가 좁아졌다는 감각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권위가 사라진 게 아니라 환상이 벗겨졌다는 데 있다. 전문가는 모든 걸 아는 사람이라는 환상은 오랫동안 우리를 보호해 줬다. 동시에 그 환상은 우리를 고립시켰다. 모른다는 말을 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AI는 그 구조를 가장 먼저 무너뜨렸다.


모르면 검색하면 되고, 정리하면 되고, 다시 물으면 된다. 그 앞에서 전문가의 전지전능한 이미지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전문가의 진짜 가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상황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다는 것을. 모든 답을 한 번에 내놓는 사람이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기준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태도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문서에도 남지 않고, 수치로 측정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주 빠르게 그 태도를 감지한다. 질문을 피하는지, 모르는 걸 인정하는지, 다른 가능성을 함께 열어두는지. 이 모든 것은 기술로 대체되지 않는다.


AI는 답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태도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 선택은 언제나 사람의 몫이다. 전문가라는 환상에는 또 하나의 착각이 있다. 전문가는 항상 옳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실수가 없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판단이 달라졌을 때 왜 달라졌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 결과가 예상과 달랐을 때 기준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신뢰한다. 신뢰는 완벽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일관성에서 생긴다. 결과가 달라도 설명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 전문가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쉽게 쓰지 않는다. 대신 이 선택에 대해 끝까지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려 한다. 그 말에는 권위는 없지만 책임은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이 사람을 다시 전문가로 만든다. AI 시대의 전문성은 위에서 내려오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옆에서 함께 서는 능력에 가깝다. 같이 고민하고, 같이 판단하고, 같이 감당하는 힘이다. 이 힘은 화려하지 않다. 속도를 늦추고, 질문을 늘리고, 때로는 답을 미룬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그 자리를 찾는다. 정답을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판단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사람을 찾는다. 전문가라는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 나는 태도를 놓으려 한다. 모든 걸 아는 척하지 않는 태도,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다.


이 태도는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든다. 항상 질문받을 수 있고, 항상 다시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 덕분에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서 있다. 권위로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신뢰로 남는 사람으로.


AI는 계속해서 더 많은 일을 대신할 것이다. 그럴수록 전문가라는 이름은 점점 가벼워질 것이다. 남는 건 어떤 태도로 이 시대를 통과했는 지다. 나는 이제 환상을 붙잡지 않는다. 대신 태도를 연습한다.


그 태도가 다음 시대의 전문성을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전 11화왜 나는 AI에게 전부 맡기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