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쉬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졌다

12화

by 이민주

많은 사람들은 기술이 발전하면 일이 쉬워질 거라고 믿는다. 반복적인 작업은 줄고, 판단은 단순해지고, 선택은 더 명확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나 역시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술이 시간을 절약해 주면, 삶도 조금은 가벼워질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 표면적인 일은 분명 쉬워졌다. 정리해야 할 자료는 빠르게 모이고, 비교해야 할 선택지는 한눈에 보인다. 과거라면 며칠이 걸렸을 일을 이제는 몇 분 만에 끝낼 수 있다. 자동화는 손의 수고를 크게 줄여주었다.


메일을 정리하는 시간, 자료를 찾는 시간, 기본 구조를 만드는 시간은 눈에 띄게 단축되었다. 화면 안에서 대부분의 반복 작업이 정리되고 추천까지 제시된다. 겉으로 보면 효율은 확실히 올라갔다. 하지만 그 효율이 곧 편안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더 자주 피로해졌다. 몸을 쓰는 일은 줄었지만, 머리를 써야 하는 지점은 오히려 늘어났다. 판단해야 할 순간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기술은 선택지를 줄여주지 않고, 오히려 늘린다.


가능성이 많아질수록 결정의 무게도 함께 커진다. 예전에는 선택의 폭이 좁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고르면 됐다. 틀리더라도 환경이나 정보 부족을 이유로 설명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여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자료는 넘치고 분석은 정교하며 비교 기준은 세분화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해도 왜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는지가 함께 따라온다. AI는 장단점을 나열하고 확률을 계산해 추천을 제시한다. 겉으로는 결정이 쉬워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추천이 나의 선택이 되는 순간, 설명해야 할 일은 오히려 늘어난다. 왜 이 선택을 택했는지, 왜 지금 이 결정을 내렸는지, 왜 다른 가능성을 포기했는지를 말해야 한다. 이 질문들은 항상 결과 이후에 몰려온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는 사람이 서 있다.


일이 쉬워졌다는 말은 손이 덜 간다는 뜻일 수는 있다. 그러나 머리가 덜 쓰인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요즘 자료를 찾는 시간보다 자료를 해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같은 데이터라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판단은 완전히 달라진다.


AI는 사실을 나열한다. 사람은 그 사실 사이의 의미를 연결한다. 이 연결의 과정이 바로 일이 깊어졌다는 감각의 정체다. 깊어졌다는 건 어려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해지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


쉽게 요약할 수 없고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이 늘어났다. 그래서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어떤 결론에 도달했느냐보다 어떤 기준으로 걸어왔느냐가 더 오래 남는다. 설명해야 할 맥락이 점점 더 많아진다.


왜 이 지점에서 멈췄는지, 왜 여기까지 허용했는지, 왜 이 선을 넘지 않았는지를 말해야 한다. 맥락이 빠지면 결과는 설득력을 잃는다. AI는 맥락을 조합할 수 있지만 그 맥락을 살아낸 감각까지 대신하지는 못한다. 그 감각은 경험과 책임이 쌓인 자리에서만 생긴다.


일이 깊어졌다는 건 그만큼 나를 더 많이 요구한다는 뜻이다. 생각을 요구하고 태도를 요구하며 때로는 나 자신을 설명하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피곤하다. 예전처럼 매뉴얼대로 처리할 수 있는 순간은 점점 줄어든다.


정해진 답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은 드물어졌다. 대신 판단의 순간이 늘어났다. 판단은 언제나 외롭고 누군가 대신 내려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평균과 표준 뒤에 숨고 싶어진다.


그러나 자동화가 늘어날수록 판단의 가치는 더 올라간다. 누구나 같은 답을 얻을 수 있을 때 무엇을 선택했는지가 사람을 구분한다. 나는 이제 일을 쉽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일을 분명하게 만들려고 한다.


이 일이 왜 필요한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어디부터는 넘지 않을 것인지를 스스로 묻는다. 그 분명함은 시간을 요구하고 빠른 처리보다 느린 확인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일은 더 깊어지고 더 무거워진다. 그 무게는 부담이면서 동시에 역할의 증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래도 예전보다 편해진 것 아니냐고.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춘다. 몸은 덜 움직이지만 마음은 더 많이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을 과연 편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AI는 일을 줄여주지 않는다. 일의 형태를 바꿀 뿐이다. 반복을 줄이는 대신 선택을 늘린다. 그 선택 앞에서 우리는 다시 사람이 된다.


고민하고 망설이며 때로는 확신 없이 결정을 내린다. 그 과정이 바로 깊이다. 나는 이 깊이를 피하지 않기로 했다. 일이 쉬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히려 그 깊이 덕분에 내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감각을 얻는다. AI 시대에 사람의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더 많은 판단과 설명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일은 줄어들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무거워진다.


나는 오늘도 깊은 일을 한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고민하는 일이고 결과보다 맥락을 지키는 일이다. 그 일이 나를 여전히 이 자리에 붙잡아 둔다. 일은 쉬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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