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지, 어떤 일은 사라질지에 대한 질문에는 늘 불안이 섞여 있다. 내가 쌓아온 시간이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이름표가 바뀌는 순간 나도 함께 밀려나는 건 아닐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 안에 있다. 직업의 미래를 묻는 말은 결국 존재의 자리를 묻는 말과 닮아 있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 질문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라지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역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놓친다. 이름으로 불리던 일들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맡고 있던 역할은 다른 형태로 남는다.
표현은 달라지고 도구는 바뀌어도 사람 사이에서 필요했던 기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 판단해야 하고, 누군가 설명해야 하며, 누군가 결과를 다시 마주해야 하는 순간은 계속된다. 직업은 제도가 만들지만 역할은 관계가 만든다. 그래서 역할은 이름보다 오래 남는다.
AI는 많은 직업의 외형을 바꾼다. 업무 방식이 달라지고 필요한 기술이 달라지며 하루의 리듬이 변한다. 반복적인 작업은 줄어들고 자동화된 판단은 늘어난다. 어제까지 사람이 하던 일은 오늘 화면 속에서 처리된다.
겉으로 보면 자리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책임지는가, 이 선택을 누가 설명하는가, 이 결과를 누가 다시 마주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역할도 사라지지 않는다.
직업은 기능의 묶음일 수 있지만 역할은 관계의 자리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누군가의 선택에 개입하며 누군가의 시간을 대신 결정할 때 비로소 역할이 생긴다. AI는 많은 결정을 돕지만 그 결정의 결과를 함께 살아내지는 않는다. 결과가 예상과 달랐을 때, 다시 설명해야 하는 순간에 AI는 그 자리에 서지 않는다.
그래서 역할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그 빈자리는 누군가 채워야 한다. 나는 요즘 내 일을 직업으로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어떤 순간에 필요한 사람이냐로 설명하려 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지식보다 방향이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속도보다 태도가 더 선명해진다. 역할의 조건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느냐로 압축된다.
왜 이 선택을 했는가. 이 선택이 틀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결과를 누구와 함께 감당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자동화되지 않는다.
기술은 선택지를 제공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답하는 순간부터 역할은 사람에게 돌아온다. 그 답은 문서에 남고 기억에 남으며 관계 속에서 다시 불린다. 그래서 역할은 매번 갱신된다.
사람들은 직업이 사라질까 두려워하지만 사실 더 두려운 건 역할을 잃는 일이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감각, 내가 빠져도 아무 변화가 없다는 느낌이 존재를 흔든다. 그러나 역할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요구하는 수준이 높아질 뿐이다.
예전에는 경험이 역할을 보장했다. 오래 했다는 이유만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매번 다시 증명해야 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판단에서, 이 설명에서 역할은 새롭게 만들어진다.
AI는 같은 답을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책임을 반복해서 지지는 않는다. 책임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태도를 만든다. 태도는 다시 역할을 굳힌다.
그래서 역할은 기술과 경쟁하지 않는다. 기술은 도구이고 역할은 태도다. 도구는 교체되지만 태도는 축적된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 결과가 달라도 설명의 방식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종종 그런 사람들을 떠올린다. 직업명이 무엇인지보다 어떤 순간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들이다. 문제가 복잡해질수록, 판단이 어려워질수록 생각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대개 화려하지 않지만 필요한 순간에 정확히 그 자리에 있다.
역할의 조건은 화려함이 아니다. 오히려 반복 가능성에 가깝다. 언제 다시 찾아와도 같은 태도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 상황이 달라도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 반복이 신뢰를 만든다.
AI는 언제나 일정한 답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태도를 유지하지는 않는다. 태도란 상황을 읽고 사람을 고려하며 결과를 감당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경험과 기억 위에서만 자란다.
그래서 나는 이제 직업의 미래를 묻지 않는다. 대신 역할의 미래를 생각한다. 어떤 태도가 더 요구될지, 어떤 기준이 더 필요 해질지를 묻는다. AI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 역할은 분명하다.
판단을 미루지 않는 사람, 설명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 결과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 역할은 편하지 않고 늘 질문받는다. 그러나 이 역할이 있는 한 사람은 중심에 서 있다. 중심은 통제의 자리가 아니라 책임의 자리다.
나는 이 역할을 계속 연습하려 한다.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다. 직업은 바뀔 수 있고 명함의 이름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역할은 선택이다.
어떤 선택 앞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다짐, 어떤 결과 앞에서 사라지지 않겠다는 태도가 쌓여 역할이 된다. AI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 역할의 조건은 거창하지 않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 설명을 남기는 것,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대신할 수 없다. 나는 그 조건을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그 조건에 맞게 오늘의 일을 다시 정의한다. 역할은 명함에 적히지 않는다.
대신 관계 속에서 불린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누군가는 묻는다. 이 선택을 누가 설명하는가, 그 결과를 누가 함께 감당하는가. 그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역할은 남는다. 그리고 그 역할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여전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