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일하기로 했다

15화

by 이민주

이제는 안다. 이 선택이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수없이 흔들린 끝에 남은 아주 개인적인 결론에 가깝다는 걸. AI 시대에 사람으로 일하겠다는 말은 기술을 거부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더 느리게 살겠다는 다짐도 아니다.


그 말은 단지 어디까지를 맡기고 어디까지를 남길지 내가 직접 정하겠다는 뜻이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기술에 맡겼다. 데이터 정리와 선행기술 검색, 반복적인 문서 검토와 유사 특허 분류까지 상당 부분을 도움받는다. 예전 같으면 며칠이 걸렸을 일을 이제는 몇 시간 안에 마무리한다.


나는 분명 예전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기술은 시간을 단축해 주고 실수를 줄이며 비교를 쉽게 만든다. 덕분에 나는 더 많은 선택지를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변화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넘기지 않은 자리가 있다. 설명해야 하는 순간, 판단이 필요한 지점, 그리고 결과 앞에 다시 서야 할 때다. 그 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고, 누군가 서야 한다. 나는 그 자리를 남겨두기로 했다.


이 자리는 불편하다. 속도를 늦추고 확신을 미루며 때로는 정답 없는 선택을 감당해야 한다. 누군가 대신 결정해주지 않고 책임을 나눠 갖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자리를 비워두고 싶어 한다.


기술이 대신해 주길 바라고 시스템이 결정해 주길 기대한다. 추천과 알고리즘 뒤에 숨으면 당장은 편해지기 때문이다. 결과가 좋으면 안심하고, 나쁘면 시스템을 탓할 수 있다. 그 구조는 언제나 달콤하다.


하지만 사람으로 일한다는 건 바로 이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완벽한 선택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틀릴 가능성을 인정한 채 그래도 내가 결정하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그 태도는 늘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AI는 오류를 줄이려 한다. 불확실성을 계산하고 위험을 최소화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안다. 완벽한 선택은 거의 없다는 걸,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감당하는 건 결국 자신의 몫이라는 걸.


그 차이가 책임을 만든다. 나는 이제 일을 잘하고 싶다는 말보다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을 더 믿게 되었다. 감당할 수 있다는 건 결과를 설명할 수 있고 관계를 다시 이어갈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고개를 숙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 선택은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사람으로 일한다는 건 항상 누군가 앞에 다시 서겠다는 의미다. 왜 이 선택을 했는지, 왜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는지 다시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그 준비는 나를 조심스럽게 만든다. 단정적인 말보다 여지를 남기는 설명을 고르게 한다.


이 조심스러움은 효율의 관점에서는 약점처럼 보인다. 시간이 걸리고 결정이 늦으며 생산성이 떨어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장 오래 남는 힘이 된다. 신뢰는 속도가 아니라 되돌아올 수 있는 구조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안다. 사람들이 끝내 찾는 건 가장 빠른 사람도, 가장 많이 아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 결정의 순간에 사라지지 않는 사람, 설명의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결과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결국 기억된다는 걸.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일하기로 했다. 기술을 쓰되 끌려가지 않고 도움을 받되 중심을 넘기지 않는 쪽을 택했다. 편해지는 대신 주도권을 잃는 길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방향을 지키는 길을 고르기로 했다. 이 선택은 나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평범하게 만든다. 질문받고 설명하고 다시 고민하는 사람으로 남게 한다. 그 평범함 속에서 나는 다시 나를 찾는다. 사람으로 일한다는 감각은 거창한 능력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겠다는 태도에서 나온다.


어려운 순간에도 자리를 비우지 않겠다는 약속, 결과가 나쁠 때도 관계를 끊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AI는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것이다. 더 잘 쓰고 더 잘 말하며 더 그럴듯한 선택을 제안할 것이다. 그 흐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사람에게 남는 일은 더 분명해진다. 결정의 책임과 설명의 무게, 그리고 관계의 지속성이다. 나는 이 세 가지를 끝까지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사람으로 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선택의 기록이다. 완성된 답이 아니라 계속 수정되고 갱신되는 태도에 가깝다. 나는 아직도 흔들리고 아직도 망설이며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그래서 여기서 멈춘다.


결론 대신 선택만 남겨둔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아직 쓰지 않았다.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 계속 써 내려가야 할 문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문장을 사람으로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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