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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Jan 18. 2024

점에게서 점에게

유이월 <찬란한 타인들>을 읽다 쓰다



그런 사진 있다. 버스 정류장 하나둘쯤 거리에서도 보이는 얼굴이, 몇십 센티미터 앞에서 보니 작은 사진들을 모아 만든 것이었던. 수백 수천 장의 사진이 한 장의 사진이 되는 이 현상을 뭐라 하면 좋을까. 누군가에겐 작품이겠고, 처음 접한 이에겐 마술일지도 모르고, 착시 혹은 속임수라 심드렁하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말이다. 이 작품, 마술, 트릭으로 어떤 얼굴을 만들어내건, 우리가 결국 보게 되는 건 하나뿐이라는 건 같겠다. 작은 사진을 100장을 썼건 365장을 썼건 그 백 배를 썼건, 그중의 한 장을 보는 일은 없으리란 얘기다. 하나의 얼굴을 그려내는 점이 되는 순간 각각의 사진은 개체의 존재감을 잃는다. 가장 두드러지는 시각 요소로서만 기능하는 ‘점’이 되는 거다. 발레복을 입고 춤추는 아이는 핑크색 점으로, 목숨을 건 안나푸르나 등정은 흰색 점으로, 갠지스 강가에서 시신을 태우는 불꽃은 반짝이는 점으로만 보이게 된다.


그러나 한 번쯤, 점 하나에 불과하던 색이나 색 없음, 반짝이는 티끌이 눈에 꽉 차게 보일 때가 있다. 발레하는 아이의 빨간 볼과 반달웃음이 시야를 채우는 순간, 핑크색 점은 우주가 된다. 기쁨이거나, 가족이거나, 생명이거나, 삶이거나, 돌아갈 수 없음 혹은 슬픔이거나.


미시세계에 바글대는 디테일들을 보고서야 이 작은 우주의 창조자 혹은 전달자를 생각하게 되는 거다. 작은 조각 수천 개로 그려낸 큰 그림만 어마어마한 줄 알았는데 수천 분의 일의 디테일을 그려내는 솜씨는 더욱 경이롭다고.


그러니까 저자는, 점 하나에 이야기와 점 하나에 사랑과 점 하나에 찬란함과 점 하나에 타인, 타인들… 그렇게. 작은 우주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거다. 수백 수천 장 중 하나의 디테일을 그리고 또 그려대고 있을 걸 생각하니 대체 큰 그림은 언제 다 그릴 건지, 완성할 수 있긴 할지 궁금하다 못해 걱정스럽다. 어쩌자고 이 기막힌 생노가다를 시작했는가 말이다.


“..는 그 총합의 아우라가 자신을 규정하게 되어 버리는 현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미지는 디테일에서 태어나 그 디테일을 역으로 삭제했다. 그러니까, ..의 슬픔은, 음반 자체의 성격이라든가 누구와 닮았다든가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지워져 버린 소중한 디테일들 때문이었던 것이다.(76p)”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개념이 없어서 이름을 갖지 못한 것들에 관하여.(115p)”


..그렇다고 한다. 소중한 디테일들이 지워져 버리는 슬픔 때문이었다고, 유일하여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러니까 ..는, 점과 점 사이를 부유하며 티끌들을 길어모아 몸소 빛나는 점이 되기로 한 유이월은, ’억지로 하나로 만들려고 하거나 복잡함 자체에 잠식될 때 종종 허름해지는(180p)‘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총대 아니, 펜대를 잡았다는 거다. 의식 한 귀퉁이에서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떠오르는 것만 같고, 눈이 멀도록 세밀화를 그리는 환영(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이 보이는 듯하고, 이젠 그의 작업이 꼭 완성되지 않아도 좋겠고, 다만 응원하게 되었다. 그리기도 전에 이미 반해버린 그림이, 예술가가 생겼달까. 기다리노니 수억 분의 한 점이라도 좋으리.  슬픔이 있는 점만이 빛나는 점인 그대를 만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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