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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Mar 13. 2024

당신의 봄은 어떤 색입니까

산담 앞에서 쓰다

노란색이었다. 기념사진 속은 끝이 보이지 않는 꽃밭이었다. 옹기종기 앉은 엄마와 친구들 키와 비슷한 꽃의 이름은 유채라 했다. 민들레보다 길고 하늘하늘하고, 개나리보다 그득하고, 해바라기보다 몽글몽글하고, 보아왔던 어떤 노란 꽃보다 더 노랗던 꽃. 다른 나라 같기만 하던 제주는, 한반도에 처음 도착한다는 봄은 그렇게, 노랗고 환한 꽃밭으로 각인되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제주에 도착했다. 이삿짐으로 꽉 채운 차와 함께 탄 배는 멀미약이 소용없게 출렁였다. 계획 하나 없이 감행한 이주였으니 꽃길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첫인상이 욕지기와 토물의 기억으로만 남아서는 안 되었다. 바깥 난간에 매달려 부글대는 바다와 마침내 보이기 시작한 한라산 봉우리를 눈에 눌러 담았다. 사계절 꽃이 핀다는 따뜻한 남쪽 섬에 도착했지만 봄은 검푸른 너울 아래, 일찍 내리고 가장 늦게 녹는 산마루 흰 눈 아래에 묻혀 있었다.

당장 먹을 밥을 벌기 위해 오일장 신문 구인란을 뒤졌다. 일당벌이 밭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귤, 무, 당근도 철이었다. 어디나 일손이 달려 초보라도 마다않고 써주었다. 해뜨기 전 약속장소에 나가면 먼저 와 앉아있는 할망이 한둘쯤, 나만큼 주뼛대는 초짜들도 두셋쯤 있었다. 칼같이 도착한 소형버스가 그날 일할 밭으로 모두를 실어날랐다. 귤 따기는 할 만했고 재밌기까지 했다. 며칠 뒤 가위가 손에 익자 제법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대개 어디서 왔냐는 삼춘들의 물음으로 시작해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을 사귀기도 했다.

텃밭은커녕 꽃밭도 가꿔본 적 없던 도시내기에겐 모든 게 서툴고 어려웠다. 온몸이 쑤시는 데다 괄괄한 삼춘한테 잔소리라도 들으면 마음까지 쑤셨다. 뭣보다 힘든 건 아픈 몸도 마음도 아니고 놀람이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와 악 소리를 지르게 하는 거미, 사마귀, 지네, 지렁이, 달팽이, 쥐며느리, 기타 등등 생물들. 휙 내쳐불면 되지 뭔 유난이냐고 퉁을 먹으면서도 이것만은 익숙해지지 않아 울먹이며 친구를 부르곤 했다. 하필 아무도 없을 때 캐려던 당근 옆에 자리한 새끼뱀을 발견했을 땐 다 포기하고 집에 가고 싶었더랬다.

갈래도 타고 갈 차가 없으니 우물거리고 있자니 친구가 눈치채고 와서 뱀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골갱이로 땅을 톡톡 치니 스륵 기어 돌담 고망으로 들어갔다. 고망 많고 습하고 따뜻하니 돌담은 뱀이 좋아하는 집이라 했다. 그래서 산(무덤)에 뱀이 많은 거라고. 그제야 옆에 있던 돌담이 산담인 걸 알았다. (일)방석 깔고 앉아 땅만 보고 전진하느라 담 너머 봉분을 미처 보지 못했던 거다. 그럴 만도 했다. 밭 가운데 무덤이라니? 무덤은 산에서만 봤었다. 산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듯, 무덤은 무덤끼리 공원묘지에만 있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무덤은 어디에나 있었다. 밭 가운데, 오름 자락과 등성이, 목장의 볕바른 비탈, 길가와 텃밭, 집담 안 마당에도 산담이 있었다. 첨 봤을 땐 놀랐고, 신기하다가, 곧 익숙해졌다. 익숙지 않아 두려웠고, 해서 더 멀리하려 했을 뿐 무덤이며 죽음이 멀리 있는 일만은 아니지 않나. 곰곰 생각하니, 실은 말이다.

토박이 친구와 삼춘들은 산담에 기대앉아 참을 먹기도 하고 커피컵을 돌 위에 내려놓기도 하는 등 스스럼이 없었다. 겁쟁이 시에따이들만 뱀집이란 말에 기겁해 멀찌감치 있다가, 뭔가 분주한 기색에 주춤주춤 다가가 봤다. 끝이 돌돌 말린 풀떼기를 보여주며 고사리란다. 고사리가 왜 녹색이냐고 물었다. 나물 반찬밖에 본 적 없어 고사리가 갈색인 줄만 알았던 거다. 웃음이 터졌고 내 얼굴도 붉게 터졌다. 겨울이 한창이었지만 산담 안은 유독 따뜻해 봄풀이 일찍 올라온다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고사리는 초록, 제주도 봄도 초록이 되었다.    

한 번 본 것들은 어찌나 잘 띄는지. 이후로 어디에서나 산담을 찾아냈고, 가장 먼저 돋아난 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는 일이 죽음을 향해 조금씩 가는 일임을, 죽음과 생명이 알아볼 수 없게 섞여 있는 게 세상임을 새삼 생각한다. 죽은 자의 집은 가까이 있고, 어둡고 얼어붙은 날엔 떠올릴 수 없고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 또한 그랬다. 감귤밭 가운데 동그랗게 앉은 봉분에, 담돌에 핀 이끼에, 보일 듯 말 듯한 동자석 미소에, 담 아래 돋은 초록에, 너무 일찍 나온 뱀의 졸음과 무덤가에 가장 먼저 핀 매화, 유채꽃 색에도.  

모두 봄이었다. 모든 색 안에 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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