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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Mar 01. 2023

정신과 여섯 번째 방문하는 날


몇 년을 망설이다 의외로 너무 쉽게 문턱을 넘어버린 정신의학과 내원이 벌써 여섯 번째를 맞이했다. 우리 병원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예약제라 많은 사람을 마주치지 않는다. 다른 정신과를 가보지 못해서 모두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항상 잔잔한 클래식이 맞이해 주며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실내온도를 유지한다. 선생님을 대면하기 전까지 긴장되는 마음을 최소한으로 하강시켜 주려는 심리적인 장치들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안정적이지 못한 정서를 위해 약물치료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온 10년이었다. 잘 씻기, 잘 먹기, 잘 자려고 노력하기, 규칙적인 운동과 취미생활. 자극적인 상황이나 자료를 접하는 것을 피하기. 필요하다면 상담센터의 도움을 받기 등. 효과가 없진 않았다.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잔잔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효과가 있었고 일상생활을 놓지 않고 정상인처럼 보이는, 아니 정상인으로 살도록 도와주는 것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다 보니 언제나 어디서나 불안감은 눌러놓은 스프링처럼 갑자기 튀어 올랐다. 한 번뿐이었던 예전 집의 배수구가 역류했던 기억이 비 오는 날마다 빗소리와 함께 떠올라 밤을 세게 만든다거나, 부동산 사기 뉴스를 보고 이미 이사 와서 3년이나 살고 있는 집에 대해 사기가 아닐까 이것저것 찾아보게 만든다거나, 위층 층간소음에서 이제는 흔적조차 없는 부모님들이 싸우던 소음을  떠올리며 심장을 움켜쥔다거나 하는 상황들이 하루에도 많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되었다. 


불안이란, 평생을 지고 가도 죽을 만큼의 위협은 주지 않지만 평생을 끌고 가느라 발목에 피멍이 들고 생채기가 반복되어도 내려놓을 수 없는 족쇄 같은 존재였다.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하지..?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나? 지금 해결 안 된 일이 있나? 내가 불안해야 할 이유가 있나? 어두운 방에서 손바닥으로 벽을 짚어가며 전등 스위치를 찾듯 그 답답하고 소용없는 확인절차를 몇 번이나 거쳐야 잠시나마 크게 숨이라도 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병원은 못 가겠어라고 생각하며 몇 년을 미뤄왔던 이유는 이 정도는 모두 다 겪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직장생활, 결혼, 육아 등을 거치며 걱정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치명적인 기억 하나 없는 사람 어디 있겠어.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정신과 가서 약을 받아오진 않을 거 아냐 라는 생각말이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해가 지며 노을을 뱉어내는 시간에 유난히 불안해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을 아이가 조금씩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엄마와 영상통화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할 무렵, 해가 질쯤 아이 저녁밥을 먹이며 그 모습을 항상 친정엄마에게 생중계하곤 했었다. 아이 두 돌,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반복하던 일상에서 엄마가 돌아가신 후 어디에도 전화할 곳 없는 그 시간이 참 괴롭고 절망스러웠다. 사람의 기억이란 무섭고도 잔인한 것이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나를 지배하며 노을이 지면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하니 어떻게 이 바보 같은 신경계를 단념시켜야 할지, 내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는 아이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몰라 내 발로 결국 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생각보다 정신과의 문턱은 낮았고 선생님은 따뜻했다. 물론 당연하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라고 묻지만 않았지 어느 병원보다 환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마음이 큰 곳일 테니까. 


상담센터가 아니다 보니 구구절절 말하진 않았다. 그냥 지금 나를 가장 옥죄는 불안감이 무엇인지. 그 시작이 어디쯤인지. 다른 상황들.. 가족이나 부부관계, 자식양육등의 상황은 괜찮은지를 간략히 얘기하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처방을 받았다. 불안장애로 찾은 병원이다 보니 신경계통의 약을 먹기 시작한다는 자체도 나에게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불안이 또 다른 불안을 낳는 수준이랄까. 이런 환자를 너무도 많이 본 선생님은 그냥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꾸준히 빼먹지 말고 약을 챙겨 먹기만 해 보자고 하셨다.  


약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졸리지도, 나른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않았다. 내 뇌 속의 어떤 신경을 주무르는지 모르겠지만 2~3주가 지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잡생각을 줄어들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잡생각이라는 것이 차라리 미래에 대한 공상, 예전 기억에 대한 회상정도라면 좋을 텐데 나는 최악의 상황,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극단적인 장면뿐이니 차라리 약이 그 생각들을 잠재워주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선생님과 조율해 가며 약을 복용하고 약이 나에게 큰 부작용 없이 잘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는 2주에 한 번씩 내원하고 있다. 사실 이번 내원 때는 약을 먹는 자체가, 언제 단약 할 수 있을까, 계속 먹어도 될까 라는 생각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는데. 요즘 약이 잘 나와서 장기복용을 한들 크게 나쁠 것이 없고 임의로 단약 하지 않는다면 천천히 최소한의 복용 후 단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 한 달째 되던 시기에 뜻하지 않던 상황에서 또 나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불안감을 느끼며 하루를 그냥 날려버린 경험을 했기에 이제 빠른 시일 내에 단약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버리기로 했다. 긴 인생 지금까지 참으며 살았으니 약물치료로 조금이나마 그 짐을 덜 수 있다면 병원 가고 약 챙겨 먹는 수고만 더 하며 조금 가볍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직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그냥 참아보자, 모두 다 그렇게 살겠지 하며 정신의학과 내원을 망설이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모자라지만 끼적거려 보았다.. 

다음 내원까지. 조금 덜 불안하고 조금 더 평온한 나를 위해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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