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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Dec 04. 2023

우연은 없다

뼈를 깎는 노력만이 있을 뿐



DSLR 열풍이 한민국을 휩쓸던 시절에는 카메라 동호회 사이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 당시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은 '사진'보다 '장비'였음을 보여주듯, 동호회 사이트 이름은 카메라 모델명을 딴 것들이 많았다 (300D클럽, 20D클럽, 5D클럽 등등...) 돌아보면 신모델들이 지속적으로 출시가 되고 있었는데 왜 이름들을 특정 모델에 국한시켰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도  중 한 곳을 찾아 회원가입을 했다. 회원수 규모가 아주 크진 않았지만 응집력이 강한 사이트였다. 회원들의 사진 수준도 매우 높아서 개인적으로 사진 관련 책을 출간하신 분들도 많았다. 그곳에서 소위 말하는 '고수'들의 사진들을 감상하며 나는 입이 쩍쩍 벌어졌다. 어떻게 일반인이 이런 결과물을 낼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진 사이트에서, 접속시 초기 갤러리에 노출되는 인기 사진들을 '일면 사진'이라 부른다. 일면 사진들은 일정 수의 회원 추천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별도 테고리에 된다. 나는 그곳 노출된 실력자들의 작품들을 보며 '얼른 사진을 부지런히 올려 일면에서 놀아(?)봐야겠다' 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가 포스팅한 사진들은 추천을 받기는 커녕, 조회수마저 처참했다. 내가 올린 사진들은 썸네일만 봐도 클릭하고 싶지 않은 수준이었 것이다. 너무 생각없이 올렸나 싶어, 다음부터는 사진 편집기로 밝기와 선명도를 조절하여 업로드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좌절감에 빠졌다. 공대생 출신이긴 하나, 인문학적, 미적 감각을 평균보다는 꽤 갖고 있다고 스스로 여겨왔기에 낯뜨거운 느낌은 더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당시 나는 빛, 노출, 구도, 카메라 설 같은 사진 관련 지식이 없었고 DSLR을 갓 구매하여 셔터 누르는 법만 배운 어중이 떠중이였다. 소한의 노력도 없이 나의 감각만으로 '웬만큼의' 사진은 만들어낼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런 잘못된 사고를 갖고 있으니 제대로 된 사진이 나올 리 없었다. 카메라를 산 지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사진을 포스팅해도 내 사진이 일면에 노출되는 일은 없었다.




다행인 것은, 그러한 좌절을 반복해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오히려 '언젠간 반드시'라는 욕심이 더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돌아보면 의미도 없는 '일면'을 위해 그토록 애썼던 게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기 그지없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목표였고 사진을 더 겸손한 자세로 배우게 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일단 사진 이론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새로운 내용을 배울수록 "내가 전문가도 아닌데 굳이 왜 그런걸 봐야 해?" 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두 번째로는, 고수들의 사진을 열심히 모방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나만의 독특함이 있는데 남의 것을 왜 베껴야 해?"라는 생각만큼 교만한 태도도 없음을 알았다. 열심히 모방하는 것은 배움의 지름길이요, 그것이 '나만의 것'을 만들어 내는 초석이 된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된다.


그리고 사진 촬영할 때 내 습관에 대해 -좀 거창한 표현이지만- 스스로를 성찰했다. DSLR의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셔터를 누르는데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한 컷 한 컷을 돌이킬 수 없었기에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그러나 디지털 기기는 자유로이 파일 이동과 삭제가 가능하니 셔터를 남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진을 찍기 전 항상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였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메모리가 충분해도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같은 피사체도 여러 구도에서 찍어본 후 집에서 홀로 파일들을 열어가며 비교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사진 보정을 열심히 배웠다. 'YMCA 야구단'이라는 영화에서 송강호가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지 않고 계속 삼진만 당하자, 그 이유를 물었는데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비겁한 변화구는 치지 않소". 이와 비슷하게 "사진 원본을 잘 찍는게 중요하지 편집은 속임수일 뿐이야."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사진을 잘 찍는 만큼 편집도 중요하다. 세계적인 사진 작가들도 편집 작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그것은 필수이다. 지금은 라이트룸이 대세지만, 당시에는 포토샵으로 대부분의 편집을 했다. 사진이 손상되지 않는 최적의 편집 방법을 공부했고, 편집을 배우자니 색에 대한 이해와 감각이 필요해졌다. 특히 색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은 많이 경험을 요구했기에 정말 오래도록 좌절을 경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히 접속한 사진 동호회 사이트 일면 끝자락에 내 사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랍다기보다는 눈물이 핑 돌았다.


2007, 양재시민의숲

사실 이 사진이야 말로 '어쩌다 걸린' 결과물이었다. 같이 출사 나갔던 후배가 다른 친구의 핸드폰을 장난으로 빼앗아 물에 빠뜨리려 하던 모습이 물에 비쳐 스냅으로 셔터를 눌렀던 것이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그때까지 했던 노력과 공부가 없었다면 나는 물웅덩이 쪽으로 렌즈를 들이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령 담아냈다 하더라도 PC에서 과연 이 사진을 편집하려 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내 실력이 이 사진으로 일정 궤도(?)에 올랐다는 것은 아니다. 이후 다시 내 사진이 일면에 노출된 적은 없었다. 물론 이 동호회 사이트가 내 실력이 오르기를 기다려 주지 못한 채 폐쇄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이유도 있었지만.




비단 사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배움이라는 것은 항상 비슷한 형태를 띠는 것 같다. 처음은 재미있고, 그 이후 한동안은 대부분 아무리 노력해도 정체된 느낌이 지속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노력의 대가를 보상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어떤 분야든 '선천성'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타고난 센스와, 저절로 몸과 시선이 이끌려지는 감각은 노력만으로 대체하기 어렵다. 이 부분에서 많은 좌절감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으리라. 그러나 탁월함을 원하는 사람에게 배움은 항상 하나의 덕목을 요구한다. 그것은 '겸손'이다. 그리고 겸손은 치열한 노력을 이끌어 자신이 보유한 (그것이 크든 작든) 선천성을 수십, 수백 배로 꽃피우는 역할을 한다.  "노력이 있어야 찾아온 우연도 살릴 수 있다." 는 말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사진 파일을 열어놓고 머리를 싸매던 밤들은 참 배움의 가치를 진하게 깨닫게 해 준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사진이라는 영역은 아무에게나 고지를 내어주지 않음과 동시에, 겸손한 이들에게는 두 팔을 벌려주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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