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의 싸움
"이게 무슨 보고서야?"
보고서 검토에 까탈스러운 상사를 만나는 것 만큼 피곤한 회사생활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라건대 그 기간이 1년 내외정도로 제한된다면) 그런 상사를 만나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지적과 빠꾸(?)와, .... 나중에는 '초등학생도 이것보다 잘 쓰겠다'는 악담까지 듣게 되며 자리에 돌아와 씩씩거려야 하는 경우를 자주 맞게 됩니다.
나는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지만 보고서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상사(관리자)가 정합니다.
레알(?) 수평적인 조직이 아닌 다음에야 우리는 회사에서 보고서라는 도구를 통해 상사와 소통해야 합니다.
좋은 기획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티타임 하며 1시간 가량 부장님께 설명해 드렸습니다. 부장님의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상무님께 올라가도 괜찮을 기획안이라는 감동적인(?) 코멘트도 듣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이 저를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나한테 얘기한 내용 1장으로 요약해서 내일 한 번 보자고"
생각을 정리하며 문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나름 고민을 해서 나온 아이디어였기에 머릿속에 들어있던 것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1장은 도저히 무리였습니다. 그 아이디어가 나오기까지 내가 했던 고민과, 적용했을 때의 여러 케이스들을 감안해 보니 4장 반이 나왔습니다.
'부장님이 1장으로 정리하라고 하신 건 가능하면 최대한 요약하라는 의미일거야. 좀 넘어도 상관없지 뭐'
그러나 다음날 아침 부장님은 인상을 쓴 채로 4장의 보고서를 뒤적거리다가 한 마디를 내뱉습니다.
"1장으로 요약하라고 했잖아? 내가 어제 대충 설명을 들었기에 망정이지, 이 문서만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것 같은데?"
"어제 말씀드린 내용은 거기에 다 들어 있는데요..."
"나한테 보고하고 끝낼거야? 상무님한테 보고 해야 결재를 맡고 착수할거 아냐"
"....."
"내가 백프로 장담하는데, 이거 갖고 상무님한테 가면 보고서 장수 확인하시고 바로 덮어버리신다. 나 지금 회의 있는거 알지? 오후까지 시간 줄 테니 빨리 다시 만들어 봐"
결국 저는 오후까지 고작 한 페이지만 줄일 수 있었고, 부장님은 한숨을 쉬며 보고서 작성을 김과장님께 넘겼습니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으로서 자존심도 상합니다.
김과장님이 얼마나 잘 써주실지 모르겠지만 한 장은 도저히 무리에요.
좋은 아이디어를 냈는데도 표현의 길이 막혀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엔지니어나 보고서 작성의 기회를 자주 접하지 못하는 현장 근무자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곤 하는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보고서는 요약 정리되어야 하며, 보고 대상자의 직급이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더욱 농축된 형태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장님께 2~3페이지라면, 상무님께는 1페이지, 전무님께는 반페이지, 사장님께는 1~2줄로 끝나야 하는 것이죠.
왜 요약을 해야 하나요?
거꾸로 묻자면, 왜 요약을 하지 않으면 안될까요? 보고를 받는 분들은 실무와 거리가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디테일한 스킬보다는 빠른 의사결정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분들이 빠른 의사결정을 하려면? 첫째로는 보고서만으로 빨리 내용 파악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크리티컬한 이슈나 아이템이 아니라면 그분들은 시간을 뺏기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부연 설명들은 그분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할 뿐입니다.
읽는 사람 관점에서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당신의 가족이 교통사고로 다쳤으니 빨리 OOO병원으로 와달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한 걸음에 내달아 병원 중환자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담당의사가 서 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된 건가요?"
의사는 충격을 받은 부위가 어떻고, 이 경우 외상 뿐 아니라 장기에도 영향이 갈 수 있으며... 등등등 복잡하게 설명을 합니다. 당신은 답답합니다.
"그래서 생명에 지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①
"그럼 완치 가능성은 어떻게 되나요?"
의사는 교통사고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치료 방식과 수술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그 방식이 환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다시 답답해 합니다.
"선생님, 장애나 불구가 될 확률이 얼마나 되냐구요?"
"다리가 부러지긴 했으나 불구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②
"그럼 치료는 얼마나 걸리나요?"
의사는 다시 병원의 입원 기간 정책과 통원 치료를 병행하는 기간을 다른 환자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합니다. 당신은 한숨을 쉽니다.
"아니, 지금 판단으로 얼마나 되어야 완치가 되냐구요?"
"수술 후 대략 3개월 정도 치료와 6개월의 재활이 필요합니다. 회복 속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구요" ③
"그러면 수술비용은 얼마나 들까요?"
지금까지 의사의 스타일(?)을 보면 예상하겠지만, 사용하는 마취약의 비용과 철심을 박는 비용 등등 설명이 진행됩니다.
"선생님, 그냥 개략적으로 알려주심 안될까요?"
"500만원 정도 소요될 것 같습니다." ④
우리가 보기에 황당한 의사선생님 같지만, 실제 매일 전쟁터처럼 돌아가는 회사에서 많은 경우 이런 설명들이 보고서에 들어갑니다. 보고 받는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로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며 인상을 쓰는 이유입니다.
위 의사와의 대화를 보고서로 바꿔보자면 당신이 알고 싶어하는 내용은 ① ② ③ ④ 뿐입니다. 다른 내용은 듣지 않아도 상관없거나, 천천히 시간을 두고 설명을 들어도 무관한 것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설명해 준다 해도 복잡한 의학용어들을 그닥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어떻게 요약해야 하나요?
보고서 작성 스킬에 대한 책들은 일반 서점에 가보면 널려 있습니다. 저도 관련 서적을 많이 보진 못했습니다만, 방법이라면 바로 위에 나와 있습니다. 의사가 아닌 환자의 입장에서 보고서를 써 보라는 것입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의 경우 수 차례 보고서를 빠꾸(?) 맞고 마음이 상해 망연자실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더 어떻게 고치라고? 그럴거면 니가 써 보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올라왔습니다.
정신이 어느정도 돌아온(?) 뒤에 다시 모니터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최대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윗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 보고서를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부분을 '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이것을 하게 되어서'
'이런 방식으로 누가 어떻게 준비해 왔고'
'앞으로는 이렇게 하려 하니'
'이런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 외의 다른 내용들은 (눈물을 머금고) 과감히 삭제를 했습니다. 정말 필요하겠다는 내용들은 보고서 본문이 아니라 별첨 문서로 별도 작성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제가 수정한 보고서를 본 상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 단어, 이 표현만 고쳐. 이렇게 잘 할 거면서 왜 그렇게 삽질을 했어?"
그런 칭찬(?)을 듣고서도 제 머릿속에 '정말 그 내용들을 빼도 괜찮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 걸 보면 여전히 저는 보고자의 입장이 되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100%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마음은 100%가 되지 못하더라도 계속 이런 경험들을 해나가다 보면 '이런 내용은 윗 사람이 싫어하는 내용이다'라는 불편한(?) feel 정도는 오는 것 같습니다.
회사생활의 소통수단인 보고서 작성 스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고서는 핵심적이고 필요한 내용들로만 구성되어야 합니다. 사진에서 구도를 잡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을 넣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인가'라고 합니다.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한페이지에서 한 줄이 오버되는 바람에 자간도 줄여보고 줄간격도 최대한 티 안 나도록 줄여보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머리를 싸맸던 기억이 많습니다. 긴 문장을 두 글자의 한자어로 줄여보려다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도 않는 단어를 무리하게 넣는 바람에 오히려 더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요약은 쉬운 것이 아니기에 끊임없는 노력과 밤샘(? 보고서는 엉덩이 싸움) 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