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나와야 부장님은 안심한다
최근 본사 영업파트로 전배온 석 과장은 2분기 매출실적 개선안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 부장에게 검토 받으러 갔습니다. 정 부장의 눈은 '추진 배경'을 지나, '1분기 현황'으로 향했고 표로 정리한 매출실적 아래에 있는 코멘트 한 줄에 멈췄습니다.
'일부 매장 소비자 만족도 매우 낮음'
"'일부 매장'이 어디를 말하는 거지? "
"그건... 일산점이랑 온양점이 포함된 걸로 아는데 다 파악해보진 못했습니다."
"그럼 전체 중 얼마나 되는건데?"
"그것도... 잘..."
"만족도 매우 낮음은 뭐야? 얼마나 낮길래?"
"고객들의 불만 접수가 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꽤 가 어느정도냐고?"
"파악해 보겠습니다."
정 부장은 이 때부터 불만스런 눈으로 보고서를 보기 시작했고, '실적 개선 방안'에서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예상 효과'에서 목소리가 거칠어졌습니다.
'1분기 대비 OO억 증가 예상, 수요예측 적중율도 상당한 개선 기대'
"상당한?? 수요예측 적중율이 얼마나 올라가는데?"
"네?... 아... 그건, 매장별로 3분기 시작을 해 봐야 구체적인 수치가 나오는 거라... 그렇지만 계획대로 진행하면 분명히 올라갈 겁니다."
"석 과장이 점쟁이야? 올라간다고 어떻게 확신해? 수치로 표현 못할 거면 이 말 자체를 빼."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향후 계획에.... '신제품 프로모션 개선 추진'.... 날짜가 왜 없나? 언제까지 할건데?"
"아직 일정이 수립되진 않았습니다. 올해 말까지 장기 플랜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석 과장."
"네."
"지금이 3월초인데 올해 말까지 하겠다는 게 계획인가? 그건 안 하겠다는 말과 똑같아. 어떤 측면에서 보면 사기라고. 정말 올 해 말까지 하는 아이템이라면 세부 계획을 별첨으로 넣던가 해야 신뢰가 갈 거 아닌가?"
"........"
"페이지 채우려고 확정도 안 된 내용 포함시키지 말고... 좀 더 고민하고 다시 써 와요."
석 과장은 입이 이만큼 나온 채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아니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숫자로 쓰라는거야? 부장님도 상황 다 아시면서 너무하네!'
"우리 딸, 아빠 얼만큼 사랑해?" 라고 제가 물었을 때, 딸이 "1억 2천 5백만원 만큼 사랑해요"라 고 대답한다면 저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것입니다 ('좀 더 불러보지 그래' ... 라는 의미가 아니라...) 숫자로 대답할 때 마음이 불편한 상황이 있고, 숫자로 대답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상황이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라는 곳에서 대부분의 상황은 후자에 속한다고 봅니다.
보고서 관련 서적들을 읽어보면 공통적으로 포함된 내용이 있는데, 바로 '숫자로 말하라', '숫자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회사의 수직적 소통방식은 보고서이며, 보고서 작성시 가장 호소력 있는 무기는 '숫자' 입니다. '경쟁사 대비 2.4% 낮은 가격'이라고 쓰면 무사히 지나갈 내용인데, '경쟁사 대비 다소 낮은 가격'이라고 쓰면 질문이 들어옵니다.
석 과장의 예가 조금 과장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보고서 작성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자주 범할 수 있는 실수들입니다.
보고서에서 가능한 참아야 할 표현들
물론 표를 통한 구체적인 수치가 이미 보고서에 표현되었다면 전체적인 현황을 한 줄로 요약할 때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수치 없이 본 표현만으로 정리를 할 경우, 보고받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된다는 거지?' 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본능적으로) 올라옵니다.
물론 보고 내용이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상위 부서 보고가 필요 없는 경우, 혹은 정말 아량이 넓은 상사의 경우에는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고 내용이 중요할수록 물음표를 남기는 '애매한' 표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 업무로 인해 보고서 작성 시간이 부족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리뷰 시간은 다가오는데 현황 조사 정리를 제대로 못해서 '전체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 이라고만 적고 무사히 넘어가기만을 가슴졸이며 기대했습니다만, 부장님의 눈은 어김없이 그 대목에서 멈췄습니다. "얼마나 낮은 거지?"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유
말은 쉽지만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확정된 매출 실적이나, 이미 실시한 설문 응답 결과 같은 경우는 기반 데이터로부터 직접적 추출이 가능합니다. 숫자로 표현하기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숫자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가적인 현장 조사에 기반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전체적으로 향상 예상'을 '전체 00% 향상 예상'으로 바꾸려면 모든 매장의 데이터를 수집해야 할 수도 있고,
'만족도 일부 하락했으나 전체적으로 상승'을 '만족도 00% 하락했으나 00%는 상승'이라고 표현하려면 별도의 설문조사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물류 적기 배송 확인 기능 구축' 뒤에 (~ 8/21)과 같은 날짜를 집어넣게 되면, 세부 일정 수립을 위해 담당자들과 회의가 불가피한 경우도 생깁니다.
숫자가 들어가야 하는 한 줄 앞에서, 근거 데이터를 위한 추가작업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싶은 유혹이 많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무리한 정량적 기대효과 산출, 꼭 해야 하는지?
특히 보고서 대로 추진했을 때 얻는 효과를 상사는 알고 싶어합니다. 제대로 측정된 기대효과라면 관리자는 그만큼 의사결정에 확신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효과는 대부분 미래의 일이기에 명확히 산정되기가 어렵습니다. 가령 (이런 내용이 보고서로 작성될 일은 없겠지만) '사무실 내 커피머신 비치 계획'으로 보고서를 써 본다고 해 봅시다. '커피 머신을 비치하면 업무 생산성 20%가 증가하며, 단가가 높은 모델을 구입할 수록 2%씩 추가 증가 예상'이라는 답이 딱 나온다면 부장님은 즉시 최고급 커피머신에 대한 경비처리 승인을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측정하기 어려운 효과입니다. 물론 사원들이 '좋아하고' '편리해 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업무 수행에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틀림없으나, 숫자로 표현하기는 힘든 내용입니다. 물론 반드시 해야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억지스레 나온 기대효과는 오히려 상사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상사의 성향이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임원에게 숫자로 어필하고 싶어하는 상사는 억지로라도 숫자로 효과를 산출하라고 할 것이지만, 형식과 포장을 싫어하는 상사는 정성적으로써도 된다고 지시할 것입니다.
Case-by-Case 이겠지만, 정량적으로 효과를 산출해야만 하는 경우 대충 근거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강조 드립니다. 명확한 논리에 근거한 산식을 세워야 하며, 그만큼 추가 조사도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걸 누가 믿나?'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말이죠.
신뢰성을 보장해주는 숫자
이렇게 보면 보고서를 구성하는 언어 역시 별도의 language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엄연히 차별화된 단어와 숫자 사용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보고서 페이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고서가 숫자만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명확한 흐름과 논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읽고 검토하는 사람에게 '이해하기 쉬운 문서'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문서의 신뢰성, 설득력'입니다. 그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바로 명확한 수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