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소망을 외친 예레미야
※ 표지그림 :「예루살렘의 파괴를 슬퍼하는 예레미야」, Rembrandt Harmensz van Rijn
... 나는 (포로로 끌려가는) 그들을 이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아 주리라. ... 나를 알아보는 마음을 주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나 야훼인 줄 알게 하겠다. 그리하면 이 백성이 진심으로 나에게 돌아와 내 백성이 되고 나도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예레미야 24:5~7, 공동번역)
그러나 유다 왕 시드키야와 그의 고관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살아 남은 자들 가운데 국내에 남아 있는 자나 이집트로 망명한 자는 썩어서 먹지 못할 무화과같이 만들겠다. 나 야훼가 선언한다. (예레미야 24:8, 공동번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1~13, 개역한글)
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예레미야만큼 내적, 개인적 측면을 강조한 사람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누구도 예레미야만큼 종교를 내면의 문제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어떤 선지자도 예레미야 이상으로 회개의 내적 본질, 즉 마음의 변화를 강조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왕에 대적하며 "국가에 대한 소망을 버리라"고 주장했던 것은, 국가를 저주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국가를 뛰어넘는 차원의 것이 있음을 알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새로이 창조하실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외적 개혁이 아닌 진실한 마음의 개혁이 이루어진 자들, 내면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고 그분의 용서와 통치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들과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실 것입니다.
보아라. 날이 이를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그 날이 오면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에게 새 언약을 세울 것이다.
그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끌어 내던 때에 세운 언약과 다른 것이다. 나는 그들의 남편이 되었으나 그들은 그 언약을 깨뜨렸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집과 언약을 맺을 것이니 나의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가슴에 새겨 두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 31:31~33, 쉬운성경)
동시대를 바벨론 땅에서 살았던 선지자 에스겔 역시 동일한 메시지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가십니다. 마른 뼈들은 멸망한 국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당신의 백성들로 재창조하십니다. 이들이야말로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살아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참조)
4장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창조된 백성'이라는 놀라운 소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세상과 미디어가, 그리고 교회 프로그램들이 말하는 많은 희망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예레미야가 평생을 바쳐 박멸하려 했던 모조품일 뿐입니다. 우리가 붙드는 가장 가치있는 소망은 이 언약입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식사 후에 잔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고린도전서 11:25, 쉬운성경)
이는 -이사야의 예언과 동일하게- 큰 소망의 말씀이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강조한 것처럼, 단지 교회 안에 소속었다고 그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요한계시록 7장)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마음의 회심 없이, 립서비스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은 여기에 속할 수 없습니다. 세속의 시스템에 완전히 스며들어 죄악을 양산하면서 예배당에 나가는 횟수만 늘려가는 이들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가라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이들은 늘 회개하는(즉, 자신을 하나님께로 항상 돌이키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용서의 가치를 알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고 그분의 통치를 능동적으로 따를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도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 (요한복음 10:14, 쉬운성경)
저자는 예레미야의 메시지 뿐 아니라, 그의 삶에 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저도 본 장을 마무리하기 전, 조금 더 예레미야에 관해 나눠보려 합니다.
예레미야의 생애가 죽음의 위협과 비난으로 점철된 이유는, 그가 국가에 대해 던진 비관적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의 눈으로 본 유다 사회는 회복의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정직한 사람을 찾아 다녔지만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까지 썩고, 결코 회개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제 피부색을 바꿀 수 있겠느냐?
표범이 제 가죽에 박힌 점을 없앨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악에 젖은 너희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13:23, 공동번역)
또한 그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희망을 가지지 말라고 선포했으며, 오히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생존만은 보장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왕과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항복하자고 말하다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매국노, 반역자로 비난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절대 겁쟁이도, 평화주의자도, 바벨론의 스파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속한 국가가 더이상 하나님의 편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나라를 끔찍히 사랑하지만, 국가와 결별할 수 밖에 없는 반나치 독일인이나 반공산주의자 러시아인과 같은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의 과정들이 그에게 쉬운 것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늘 자신과 하나님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그는 사명을 받은 순간부터 커다란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는 수시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픈 유혹을 받았으며, 백성들을 비난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들을 몇 구절 인용해 보겠습니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한 그자도 천벌을 받아라. (예레미야 20:14~15, 공동번역)
이 백성이 저를 비꼬아 말합니다. '야훼가 엄포를 놓더니, 어찌 되었느냐? 그렇게 야단치더니 어디 해보시지!'
제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라고 재촉이라도 하였습니까? 암담한 날이 오기를 바라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무엇이라고 아뢰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분명히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예레미야 17:15~16, 공동번역)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미야 20:7~9, 공동번역)
우리는 여기서 겁 많고 상황을 회피하려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견디지 못해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으며, 스스로 태어난 운명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오늘날 예레미야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심리치료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분명히 예레미야는 -현대 기독교가 추구하는- 완벽한 인격을 갖춘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외부에는 난공불락의 '놋성벽'이 있었습니다(1:18). 그 누구도, 어떤 위협도 그의 메시지를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선지자로서 자격없음을 몇 번이고 탄식했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야말로 저물어가는 유다에 가장 필요한 선지자임을 증명해내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레미야는 대중들의 조롱과 왕의 위협에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실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조금의 상처에도 쓰려저 버리고, 예상과 다른 기도응답에 헤매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될 때까지 잠수(?)를 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은, 모든 의문과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면서도 (그리고 그 응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너의 사명을 다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신앙의 요청은 온전한 인격을 갖추라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의문들을 회피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두려움과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래서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한 인격의 헌신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죽기까지 순종하였고, 그의 영혼이 갈등과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고픈 충동을 받았을 때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원대로 하옵소서"(누가복음 22:42)라고 삶으로 말하며 자기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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