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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Apr 20. 2019

4. 파기된 언약과 새 언약 (4)

진정한 소망을 외친 예레미야

※ 표지그림 :「예루살렘의 파괴를 슬퍼하는 예레미야」, Rembrandt Harmensz van Rijn


 예레미야의 생애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눈물로 점철된 시간들이었습니다. 유일한 소망이라 여겼던 요시야 왕은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고, 여호야김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했으며, 시드기야는 나라의 멸망 앞에서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이다가 비참한 말년을 맞이하고 맙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며 선지자는 애통하는 심정으로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으며, 나라는 망해버렸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여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멸망 후, 그 땅에 남아있던 예레미야는 국수주의자들의 테러에 휩쓸려 애굽으로 끌려가 생애를 마감합니다.

 실패로 끝나버린 것 같은 그의 인생... 그러나 그가 던진 소망의 메시지는 오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크나큰 소망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국가라는 체제를 넘어 바라본 소망


 줄곧 멸망을 외쳤왔던 예레미야는 사실 소망을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째서 그러할까요? 예레미야에게 있어 유다의 멸망은 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거짓 선지자들과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유다의 멸망은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멸망이라는 것을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멸망은 하나님의 패배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선지자가 그리했듯이- 국가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냉정히 돌아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부강해지고 탄탄한 체계를 갖출 때 신속히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직후가 그랬고 솔로몬 시대가 그러했으며, 분열 왕국때도 형편이 나아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감수성이 민감해지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돋아날 때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의 손 아래에 두시거나 흩으실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죄악의 수레바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도 오히려 귀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가의 멸망을 원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표적인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신 무화과 광주리의 환상입니다.  예레미야 2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처음 포위했을 때, 여호야김이 죽고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릅니다. 여호야긴이 항복하자 바벨론은 그를 포함한 유다의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엘리트들을 데려갑니다. 젊은 제사장 에스겔도 이 때 끌려갔습니다. 이것이 2차 포로입니다. 당시에는 이동 수단이 두 다리밖에 없었으므로 바벨론까지 먼 거리를 걸어야 했던 포로들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 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엄청난 거리에 있는 바벨론으로 한 번 끌려가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기정 사실이었겠지요. 포로로 끌려가게 된 사람들의 정신적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반대로 끌려가지 않고 유다에 남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까요?

 

이 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두 무화과 광주리가 나타납니다. 한 광주리에는 싱싱하고 먹음직한 무화과가 담겼고, 다른 하나에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썩은 무화과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무화과 vs 썩어 먹을 수 없는 무화과

 

 하나님은 이 환상을 해석해 주시며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포로들을 의미했습니다.

 

 ... 나는 (포로로 끌려가는) 그들을 이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아 주리라. ... 나를 알아보는 마음을 주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나 야훼인 줄 알게 하겠다. 그리하면 이 백성이 진심으로 나에게 돌아와 내 백성이 되고 나도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예레미야 24:5~7, 공동번역)

 

그리고 썩어 먹을 수 없는 나쁜 무화과는 바로 유다에 잔류하게 되는 왕과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 왕 시드키야와 그의 고관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살아 남은 자들 가운데 국내에 남아 있는 자나 이집트로 망명한 자는 썩어서 먹지 못할 무화과같이 만들겠다. 나 야훼가 선언한다. (예레미야 24:8, 공동번역)

 

 하나님께서는 끌려가는 포로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며, 회개하는 삶으로 인도하시고 결코 멸망시키지 않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이 그 곳에서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반대로, 포로의 삶을 면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버릴 것이고 흩을 것이며, 모든 환난과 수욕과 기근과 칼과 전염병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당시 유다 백성들의 시각과 완전히 반대됩니다. 아니, 포로로 끌려가는 이들을(즉, 국가를 상실한 이들을)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다니! 그리고 행운아로 유다에 남은 이들에게 멸망을 선포하시다니!

 

 이처럼 예레미야가 바라보았던 소망의 대상은, 끊을 수 없는 죄악의 시스템 아래에 있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국가라는 체제를 잃더라도 타국에 끌려가서 연단 받고 스스로를 성찰하게 될 포로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드디어 하나님께 마음과 귀를 열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포로들에게 신앙의 약속과 격려를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1~13, 개역한글)

 




비극 속에서도 신앙을 지탱케 해 준 메시지


 저는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포로기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켜주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국가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훗날 유다가 멸망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헤어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을 때, 유일한 쿠션 역할을 해 준 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었습니다.


 유다가 멸망의 초시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을 때 거짓 선지자들이 외쳤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나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강하시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사랑하시기에 결코 유다가 망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너희의 상처는 크지 않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6:14)

 “하나님께서 2년 안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꺾겠다고 말씀하셨다”(28:11)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27:9)

 “너희가 평안하리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23:17)


 그러나 유다와 예루살렘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잿더미가 되었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거짓 희망에 삶을 의지하던 백성들은 엄청난 멘탈 붕괴를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방 신의 승리이고 하나님의 실패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 가운데, 이 비극을 하나님의 '실패'가 아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도구'라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였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항상 역사의 지배자가 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가장 극심한 재난 속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지옥의 밑바닥에서도 늘 진리가 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지금 자신들 손에 붙들고 있는 것들(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 낙관의 말을 지껄였을 뿐입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비극이 닥치면 완전히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런 예언들은 역사에 대처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오랜 시간동안 이방인으로 살면서도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러한 거짓 소망들을 철저히 박멸시켰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지닌 백성들


 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예레미야만큼 내적, 개인적 측면을 강조한 사람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누구도 예레미야만큼 종교를 내면의 문제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어떤 선지자도 예레미야 이상으로 회개의 내적 본질, 즉 마음의 변화를 강조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왕에 대적하며 "국가에 대한 소망을 버리라"고 주장했던 것은, 국가를 저주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국가를 뛰어넘는 차원의 것이 있음을 알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새로이 창조하실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외적 개혁이 아닌 진실한 마음의 개혁이 이루어진 자들, 내면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고 그분의 용서와 통치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들과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실 것입니다.


 보아라. 날이 이를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그 날이 오면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에게 새 언약을 세울 것이다.
 그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끌어 내던 때에 세운 언약과 다른 것이다. 나는 그들의 남편이 되었으나 그들은 그 언약을 깨뜨렸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집과 언약을 맺을 것이니 나의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가슴에 새겨 두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 31:31~33, 쉬운성경)


 동시대를 바벨론 땅에서 살았던 선지자 에스겔 역시 동일한 메시지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가십니다. 마른 뼈들은 멸망한 국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당신의 백성들로 재창조하십니다. 이들이야말로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살아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참조)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구스타브 도레


 4장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창조된 백성'이라는 놀라운 소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세상과 미디어가, 그리고 교회 프로그램들이 말하는 많은 희망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예레미야가 평생을 바쳐 박멸하려 했던 모조품일 뿐입니다. 우리가 붙드는 가장 가치있는 소망은 이 언약입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식사 후에 잔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고린도전서 11:25, 쉬운성경)


 이는 -이사야의 예언과 동일하게- 큰 소망의 말씀이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강조한 것처럼, 단지 교회 안에 소속었다고 그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요한계시록 7장)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마음의 회심 없이, 립서비스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은 여기에 속할 수 없습니다. 세속의 시스템에 완전히 스며들어 죄악을 양산하면서 예배당에 나가는 횟수만 늘려가는 이들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가라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이들은 늘 회개하는(즉, 자신을 하나님께로 항상 돌이키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용서의 가치를 알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고 그분의 통치를 능동적으로 따를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도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 (요한복음 10:14, 쉬운성경)  





Epilogue : 예레미야의 슬픔과 사명


 저자는 예레미야의 메시지 뿐 아니라, 그의 삶에 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저도 본 장을 마무리하기 전, 조금 더 예레미야에 관해 나눠보려 합니다.


 예레미야의 생애가 죽음의 위협과 비난으로 점철된 이유는, 그가 국가에 대해 던진 비관적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의 눈으로 본 유다 사회는 회복의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정직한 사람을 찾아 다녔지만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까지 썩고, 결코 회개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제 피부색을 바꿀 수 있겠느냐?
 표범이 제 가죽에 박힌 점을 없앨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악에 젖은 너희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13:23, 공동번역)


 또한 그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희망을 가지지 말라고 선포했으며, 오히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생존만은 보장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왕과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항복하자고 말하다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매국노, 반역자로 비난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절대 겁쟁이도, 평화주의자도, 바벨론의 스파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속한 국가가 더이상 하나님의 편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나라를 끔찍히 사랑하지만, 국가와 결별할 수 밖에 없는 반나치 독일인이나 반공산주의자 러시아인과 같은 처지였던 것입니다.


국가의 멸망 앞에 탄식하는 예레미야,  E.J.F. Bendemann


 그러나 이러한 사명의 과정들이 그에게 쉬운 것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늘 자신과 하나님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그는 사명을 받은 순간부터 커다란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는 수시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픈 유혹을 받았으며, 백성들을 비난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들을 몇 구절 인용해 보겠습니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한 그자도 천벌을 받아라. (예레미야 20:14~15, 공동번역)


 이 백성이 저를 비꼬아 말합니다. '야훼가 엄포를 놓더니, 어찌 되었느냐? 그렇게 야단치더니 어디 해보시지!'
 제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라고 재촉이라도 하였습니까? 암담한 날이 오기를 바라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무엇이라고 아뢰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분명히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예레미야 17:15~16, 공동번역)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미야 20:7~9, 공동번역)


 우리는 여기서 겁 많고 상황을 회피하려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견디지 못해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으며, 스스로 태어난 운명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오늘날 예레미야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심리치료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분명히 예레미야는 -현대 기독교가 추구하는- 완벽한 인격을 갖춘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외부에는 난공불락의 '놋성벽'이 있었습니다(1:18). 그 누구도, 어떤 위협도 그의 메시지를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선지자로서 자격없음을 몇 번이고 탄식했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야말로 저물어가는 유다에 가장 필요한 선지자임을 증명해내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레미야는 대중들의 조롱과 왕의 위협에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실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조금의 상처에도 쓰려 리고, 예상과 다른 기도응답에 헤매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될 때까지 잠수(?)를 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은, 모든 의문과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면서도 (그리고 그 응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너의 사명을 다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신앙의 요청은 온전한 인격을 갖추라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의문들을 회피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두려움과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래서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한 인격의 헌신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죽기까지 순종하였고, 그의 영혼이 갈등과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고픈 충동을 받았을 때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원대로 하옵소서"(누가복음 22:42)라고 삶으로 말하며 자기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 5. 바벨론 포로와 새 출애굽(1) 에 이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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