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남은 정체성, 율법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과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과 맺어 주신 언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헛된 우상들을 섬기며 어리석은 길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다른 나라들이 하는 것처럼 악한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열왕기하17:15, 쉬운성경)
나는 왕에게 군대와 기마병을 보내 달라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웠습니다. 군대를 보내 준다면 길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원수들을 물리쳐 이길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미 왕에게 "누구든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지만,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은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금식을 하면서 여행하는 동안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에스라 8:22~23, 쉬운성경)
2차 귀환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고생하던 백성들은 인적, 물적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이 모든 것들보다 우선시 했던 목적 하나를 예전부터 준비해 왔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통한 진정한 개혁을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 7:10, 개역개정)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한 이후,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율법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합니다(느헤미야 8~10장). 성전 앞 광장에서 수많은 백성들에게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이 낭독되고, 청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그 말씀을 듣습니다. 깨달음을 경험한 백성들은 울며 통회하기 시작합니다. 에스라의 사역이 예루살렘 공동체에 '부흥'의 감정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는 백성들이 얼마나 진지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했는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헤미야 8:5~9)
에스라는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오경의 율법을 진정한 강령으로 공동체에 정착시켰습니다. 유대 백성들의 삶에 대한 율법의 영향력은 에스라의 율법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유대교는 율법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참된 이스라엘의 구성원인 것이지요.
이런 상황들 속에서 에스라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보여준 열정, 즉 말씀을 향한 열정은 순결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갑옷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금새 꺼져버릴 것만 같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열정적인 말씀 운동으로 인해 생기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세속 문화로 넘쳐나는 현대 사회의 성도들에게도 도전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우리는 과연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얼마나 차별점을 갖고 있을까요? 물질을 향한 탐욕과 출세를 향한 야망, 그리스도가 제시한 길보다는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욕심들로 가득한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 회복기에 이스라엘이 맞서야 했던 '이방 문화에의 동화'라는 위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협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복기의 남은 자들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내려 했습니다. 물론 그들도 그것이 완벽한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그들에게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이스라엘은 거룩한 공동체로 남아서 끈질기게 존재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생계를 포기하고 쉬운 길을 버려야 했습니다.
에스라를 비롯한 그들의 몸부림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순결하게 지키려 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스스로를 비추어 늘 점검하며 회개와 돌이킴을 지속해야 합니다. 얼핏 보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성경을 접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스마트 기기의 보급으로 이제 성경책 자체가 필요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보유했다고 해서 말씀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편하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은 실상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속 문화에 젖어 그들과 동일한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있고, 죄된 삶을 극복해낼 수 없다면 우리는 말씀의 능력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필요할까요? 매우 단순한 답일 지 모르지만,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백성들과 같은 '목마름'이 아닐까요? 이대로 가다가는 세상에 먹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그저 생계를 유지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갈급함이, 오직 말씀만을 전해야겠다는 에스라의 사명과 만났고 부흥의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들도 동일합니다. 세속 가치에 동화되고 죄에 잡아먹혀 버리는 우리 자신들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는 애통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진지한 슬픔이 말씀을 향한 경외감(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것이 얼마나 부족한지요!)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온종일 선 채로, 비를 맞으며 에스라의 율법 낭독에 귀를 기울였던 그들의 자세가 회개의 열매를 맺게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 6. 거룩한 국가공동체와 묵시적 왕국 (3) 에 이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