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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Nov 08. 2021

남편의 허세가 필요한 순간

임신 제22주

지금까지 임신을 주제로 쓰면서 대부분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을 기록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임신은 예상보다 훨씬, 시쳇말로, 빡셌다. 아내가 임신 때문에 즐거워한 적은 아직 단 하루도 없다. 그저 조금 힘든 날과 매우 힘든 날이 있을 뿐이었다. 임신을 이토록이나 버거워하는 아내를 보는 것은 나로서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임신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마냥 평온한 얼굴로 배를 어루만지는 임부들을 만나보고 싶다. 당신들은 정말 임신이 즐거운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힘든 적은 없었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어제 아내가 내게 말했다. 요즘 자신은 화로 가득 차 있다고. 태평하게 임신을 즐기는 남들과 달리, 매 순간이 힘들어 절절매는 자신에 대한 화로. 그리고 이 화가 출산 후에도 계속되어 아이를 향할까 봐 두렵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도 잘하고 있다는 말, 앞으로 점점 나아질 거라는 설탕물 같은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내에게 어쭙잖은 토닥토닥거림은 씨도 안 먹힐 걸 안다. 아내가 지금 겪는 고통을 고상한 생명의 위대함따위로 포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힘든 건 힘든 거니까. 그래서 대신 이 말을 했다. 새로 태어날 아이와 우리 둘이 꾸릴 세 식구는 행복할 거라고. 내겐 그런 확신이 있었다. 태양도 뚫을 만큼 부리부리했던 아내의 눈동자는 이내 가엾은 길고양이의 눈망울이 되었다.


“우리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아내가 가냘픈 목소리로 되물었다.


난 꼭 그럴 거라고, 내가 약속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물론 근거는 없다. 불안해하는 아내를 안심시킬 호언장담이 필요하다고 느껴 부린 허세다. 하지만 안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나는 훌륭한 이인조다. 내게 없는 건 아내가 가졌고, 아내에게 없는 건 내가 가졌다. 이 정도의 팀워크라면 분명히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한다. 솔깃해하는 아내에게 조금 더 확신을 주고 싶어, 내가 가장 기대하는 바를 아내에게 말했다.


순천갈대밭을 딸과 함께 거닐고, 순천그림책도서관에서 딸에게 책을 읽어주고, 순천문화센터 수영장에서 딸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고, 부엌에서 딸과 함께 요리하는 우리  식구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사실을 정밀초음파  알게 됐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 순간들이다. 열과 성을 다해 아내에게 우리가 앞으로 경험할 아름다운 순간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노련한 세일즈맨에 빙의하여 아내에게 우리의 미래를 팔았다. 평소에는  허세와 뻥을 얄짤없이 간파하는 아내지만, 이번엔 먹힌 듯했다. 아내의 얼굴로부터 불안함이 걷히기 시작했다. 이불을  끝까지 끌어올린 아내는  손을 이불 밖으로 꺼내  손을  잡았다. ‘  믿어.’라고 손으로 대신 말하는 것처럼. 아내를 안심시킨  같아 뿌듯했다. 오늘도 남편 노릇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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