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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Nov 10. 2021

혼혈아 작명은 이렇게 실패한다

임신 제23주

아내와 난 임신 20주까지만 해도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인 줄 알았다. 당시는 우리가 한창 작명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였는데,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이름 공모전을 펼쳤다. 아이디어를 얻고자 국제결혼을 한 주변 커플들에게 물어보니, 혼혈아 작명은 크게 두 파로 나뉜다고 했다. 아예 영어와 한국어 둘 다로 발음하기 쉬운 이름 하나를 짓거나, 아니면 한글 이름 따로 영어 이름 따로 두 개를 짓거나, 이 두 가지 접근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혹시나 해서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다들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했다. 이 두 가지 방법론을 모두 고민해본 결과 우리에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번째 방식의 문제는 선택지가 좁다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새라 ‘조니같은 납작하고 흔한 이름이었다.  번째 방식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에게 전혀 다른 이름  개를 주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고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물론 아이가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려면 한국인 기준에서 발음하기 쉬운 이름이어야 한다는 점은 우리 역시 인정했다. 그런다 한들 완전히 다른 이름  개를 가지고  경우 나중에 자아분열 등의 부작용이 따를  있다고 판단하여  역시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합의를  작명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름의 반은 영어, 반은 한국어일 . 예를 들어,  성을 따르면 이름은 영어로 짓고, 아내 성을 따르면 한글 이름을 지을 . 둘째는 한국어와 영어  다로 발음하기 쉬운 이름이어야  . 예를 들어, ‘Carlos(카를로스)같은 이름은 '를'에서 '로'로 넘어갈 때  턱이 파 불편하지, ‘James(제임스) 발음하기 쉽기 때문에 괜찮음, 이런식으로 말이다.


나름의 개똥철학을 가지고 이 이름 저 이름을 집적대던 어느 역사적인 날, 아내가 자신이 예전부터 좋아해 온 이름이 있다며 내게 말했다. 여태껏 아내가 마음에 드는 이름은 내 마음에 안 들고, 반대로 내가 ‘이거다’ 싶어 얘기하면 아내가 고개를 젓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내가 이번처럼 의미심장하게 뜸을 들인 적은 처음이라, 기대를 품고 귀를 기울였다.

“Finn 어때?”

‘Finnagan’의 줄임말인 ‘Finn’은 스코틀랜드식 이름으로, 적당히 희소성도 있으면서 뭔가 엣지있게 들렸다. 스코틀랜드 에딘브러 대학을 나온 아내는,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대학시절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스코틀랜드 정취를 물씬 풍기는 이 이름이 좋겠다며 날 설득했다. 솔깃했다. 하지만 이걸 한글화했을 때가 문제였다. F 발음이 없는 한글로는 ‘핀’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Finn’과 ‘핀’은 천지 차이였다. ‘Finn’은 왠지 <콜미바이유어네임>의 티모시샬라메처럼 엣지있고 까리한 반면, ‘핀’은 일단 이름 같지도 않고, 누군가 이 이름을 가졌다면 어딘가 한 봉지 빠진 사람일 것만 같았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쯤에서 독자에게 내 아내의 성이 ‘Murray’라는 사실을 밝혀야겠다. ‘Murray’는 한글로 ‘머레이’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본토 발음은 ‘머리’에 더 가깝다. 따라서 이름을 ‘Finn’으로 하고 아내의 성을 따를 경우, 아이의 한글 이름은 ‘머리핀’이 되고 만다.


실성하듯이 웃는  보고 아내는 어리둥절해 했다. 가까스로 제정신을 수습한 내가  사태를 설명하니 아내 역시 자지러졌다. 600 한글 역사상 머리핀을 이름 삼겠다는 작자들은 단연코 우리가 처음일 거라고 내가 말했다. 이건 한국인과 영국인이 만나 아이를 가져야만 일어날  있는 일이고, 그중에서도 영국인 배우자의 성이 ‘Murray’여야만 가능할까 말까  일이니,  희귀성을 이루 말로 표현할  없었다. 한참을 웃은 우리는 ‘머리핀 무슨 일이 있어도  된다는  의견일치를 보았고, 다만 아이가 태어나 어느 정도 자라면   역사적인 얘기를 들려주기로 약속했다.


P.S. 이후 정밀초음파를 통해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우린 ‘베일리’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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