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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Dec 16. 2021

태어나지도 않은 주제에 감히

임신 제28주

이번 주부터 임신 3분기다. 베일리는 지금 미숙아로 태어나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장기를 갖췄다(장기 만드느라 수고 많았어, 베일리! 니 장기 만드느라 엄마 장기 짓누른 건 용서해줄게). 아내는 베일리가 평균치인 40주를 다 안 채우고 나올 거 같다고 예언했지만, 주치의는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라고 했다. 어제 초음파 검사를 통해 본 베일리는 어느 때보다 인간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사실 너무 인간다워서 움찔했다. 지금까지는 초음파를 해도 뭐가 뭔지 잘 몰랐다. 의사가 팔이라고 하면 팔인가보다 하고, 다리라고 하면 다리인가보다 했지, 완성된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파충류나 해양동물과 더 닮은 듯했다. 그랬던 베일리가 처음으로 인간처럼 보였다. 모니터 안에서 나를 향해 눈을 껌벅거리는 베일리와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굳이 내 가난한 언어로 표현해본다면, 감격스러움과 두려움 사이 어딘가의 감정이었으리라. 앞으로 저 생명과 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 남은 생을 다할 것이라는 감격스러움. 동시에 앞으로 저 아무것도 모르고 귀엽기만 한 무방비 상태의 존재를 아내와 내가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


어제 세상사를 잠시 잊고 싶어 <벽 속에 숨은 마법시계>를 보는데 대사 하나가 껌처럼 달라붙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말이야, 아이 걱정을 한순간도 내려놓지 못하면서도, 그걸 그냥 계속하는 거야. 사실 그게 부모 역할의 전부야.” - 플로렌스

내가 오늘 병원에 다녀온 후로 단단히 쫄아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이런 쐐기를 박으시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영화는 시시껄렁하게 끝났지만, 저 한마디의 여운은 가시질 않았다. 정말 부모가 되면 걱정 쉴 날이 없을까? 그럼 내 인생은 어떡하지? 근데 한편으론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되기 전인 지금도 걱정은 밥 먹듯이 한다. 그럼 사실상 부모가 된다는 건 원래 안 하던 걱정을 하게 되는 게 아니라, 걱정거리, 즉 걱정하는 내용이 달라질 뿐이라는 얘기일 수도 있다. 달리 표현하면 걱정의 총량은 그대로인데, 원래 내 위주로 하던 걱정을 베일리 위주로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일리 있는 논리라고 생각한다. 큰 걱정이 작은 걱정을 덮어버리는 경험, 다들 해봤을 것이다. 추측건대 부모가 아이 걱정하는 것도 이 만고진리를 거스르진 않을 것이다. 이 제로섬걱정론에 의하면, 난 나만 알던 이기적인 놈에서, 내 딸만 아는 이타적인(?) 놈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부모가 되면 어른이 된다는 옛말도 이래서 있는 것 아닐까? 어찌 됐든 플로렌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난 앞으로 베일리 걱정하다 죽을 일만 남았다.


하지만 우리의 착한 베일리는 걱정만 끼치진 않을 것이다. 채찍질했으면 당근도 준다. 어떻게 아냐고? 바로 어제 그랬으니까. 산부인과에 가는 길 내내 아내와 난 순천집을 생각하며 “인생 망했다”를 외치고 있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한 공사 이튿날, 골조만 남긴 집은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전집주인이 10년 전 증축하는 과정에서 손대서는 안 되는 부분을 손댔던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집을 새로 짓느냐, 아니면 구조사를 불러 집을 보강하느냐의 기로에 선 우리에겐 어떤 미래도 그저 암담해 보일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릴 향해 눈을 껌벅대는 베일리를 마주했고, 불과 10분 전까지 하던 집 걱정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는 베일리를 보며 아내와 난 다시 세상이 고요해짐을 느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집도 중요하지만, 딸의 건강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날 아침 놀라가(장모님) 우리에게 건넨 위로의 말이 떠올랐다. 놀라 왈, 세상에는 두 부류의 문제가 있단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 사실 후자에 비하면 전자는 문제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문제도 아니다. 베일리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함이 우러나왔다. 그는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주제에 벌써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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