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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Nov 28. 2021

임신 후반전에 산부인과를 옮긴 이유

임신 제24-26주

예전에 기타를 배울 때도 그랬고 헬스장에서 PT 받을 때도 그랬다. 기본기를 탄탄히 해야 한다며 주구장창 스케일 연습만 시킨 기타 선생님이나, 3 무게를 늘리는 데에만 혈안이  있는 트레이너나, 배움의 당사자인 내가 원하고 목표하는 바를 그들은 묻지 않았다. 기타를 배우 이유는 내가 원하는 노래  곡만 떼고 싶어서였고, PT 신청한 이유는 프리즈비를  잘하고 싶어서였다. 만약 그들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싶어 그들을 찾아왔는지를 궁금해하고 이해하려 했다면, 우리가 조금 더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산부인과를 옮긴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제모, 관장, 내진, 태동검사, 촉진제, 무통주사와 같은 어마무시한 단어들을 선택사항이 아닌 반필수조건처럼 제시하는 산부인과와는 계속 손발이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산모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두려움을 안고 있고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지를 주치의가 먼저 물어  적은  번도 없었다. 우리가 의사 눈치를  가며 어렵사리 얘기를 꺼내도  시원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병원이 권하는 대로 하는  좋지 않겠냐는 회유뿐이었다. 결국 우리를 조금  이해해주고  기울여줄 산부인과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임신 40주 중 절반이 지난 시점에 산부인과를 옮기는 것은 꽤 모험적인 결정이었다. 산모에게 주치의와의 유대감 형성은 굉장히 중요하다. 주치의를 신뢰할 수 있어야 안 그래도 변수가 많고 긴장되는 순간에 조금이나마 스트레스를 덜고 순산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신뢰를 쌓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임신 후반전에 들어선 지금 새 주치의와 관계를 맺기에는 빠듯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와 결이 다른 병원을 꾸역꾸역 다닐 수는 없기에, 며칠 간의 리서치 끝에 결국 자연주의 출산을 하는 병원을 예약했다.


첫 진료부터 옮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치의가 우리에게 던진 첫 질문은 이거였다.

“분만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말을 듣자마자 절로 무릎을 쳤다. 그래, 이게 맞지.  엄청난 일을 치르는데 당사자의 생각을 듣는  당연한 거지.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봇물 터지듯 선생님께 우리의 걱정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회음부 절개는  하고 싶다, 무통주사 없이 하고 싶다, 남편도 모든 과정을 함께하고 싶다 , 지금까지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선생님은 마냥 인자한 얼굴로 우리 얘기를 경청하시더니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자연분만과 자연주의 출산(이하 자출) 구분해야 한다고 하셨다. 선생님 , 일반 병실에서 제왕절개를 하지 않고 질식분만을 하는 것이 곧 자연분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출은 주로 일반 병실이 아닌 가정집처럼 꾸며놓은 자출 전용 병실에서 조산사의 도움을 받아 한다고 하셨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의료개입이나 수술 없는 분만이면 굳이 자출까지  필요는 없고, 무통주사나 촉진제를 쓰지 않고 자연분만을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하셨다. 조금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우리는 자출 조산사님과 만나서 상담한  결정하기로 했다.


‘조산사’는 내게 굉장히 이질적인 단어이다. 지금까지 내가 ‘조산사’라는 단어를 접한 횟수는 손에 꼽힐 것이다. 조산사 자체가 사양직업인 것도 있고,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출산 참여도가 낮은 것도 이유다. 내 아빠만 해도 우리 형제가 세상에 나올 때 엄마 곁에 없었다. 당시 여느 가장이 그랬듯 일하느라 바빴고 출장 다니느라 바빴다. SBS 다큐 <아기 어떻게 낳을까?>에 의하면 출생 직후의 맨몸 스킨십이 아이의 정서발달과 행동발달에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문득 내가 아빠보다 엄마에게 더 친밀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단지 전업주부였던 엄마와 보낸 시간이 길어서일까? 아니면 출생 직후 엄마와 살갗을 맞댈 수 있어서였을까? 만약 엄마와의 스킨십을 마치고 아빠의 가슴에 안길 수 있었다면 아빠라는 존재에 조금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을까?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모를 일이다. 하지만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자마자 살과 살이 맞닿는 존재와, 출산 후 며칠이 지나서야 만나는 존재는 그 친밀도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물론 아빠를 탓하거나 원망하는  아니다. 그가 지난 30년을  빠지게 일했기에 나와 형은 구김살 없이 자랐고, 유학까지 다녀와 대부분의 사람이 누리지 못한 엄청난 특혜를 누리면서 산다.  특혜는 내가 누리기 싫다 한들 이미  삶의 일부이며, 아마  태어날 베일리에게까지 대물림될 것이다. 어릴  그가 집에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시간만큼은 자상한 아빠 역할을 해내려고 노력했다. 감히 자식으로서 그를 평가한다면 그는 훌륭한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내가 아버지가 되려는 시점에 그와의 관계를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내가 세상에 나온  , 그와 살갗을 맞댈  있었다면 과연 우리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막연한 아쉬움.


조산사와의 만남  자출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자연분만과 자출의 가장  차이는 자연분만은 의사 중심, 자출은 산모와 아이 중심이라는 점이다. 물론 병원마다 다르고  의사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한줄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분만에산모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는 다리를 벌린 채로 침대에 눕는 것이다. 반면 자출에선 산모가  자세로만 눕지 않는다. 뱃속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계속 자세를 바꾸고, 방안을 서성이기도 하며, 남편과 함께 운동도 하고 스트레칭도 한다. 자연분만은 의사의 편의를 위해 제모를 권하지만, 자출은 제모를 하지 않는다. (보통 회음부 감염 방지를 위해 제모를 한다고 알려졌지만 연구결과에 따르면 음모 유무 여부와 감염률은 무관하다고 한다.) 자연분만에선 관장으로 장을 비우고, 금식으로  상태를 유지하지만, 자출은 평소대로 식사도 하고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자연분만에선 입원부터 출산까지 태동검사 기계를 복부에 부착한 상태를 유지하지만, 자출에선 그때그때 산모의 상태를 보고 검사 여부를 결정한다. 자출에선 산모가 처음부터 끝까지 조산사의 일대일 관리를 지만, 자연분만에선  의사가 여러 산모를 동시에 상대한다. 따라서 산모가 시시각각 나타내는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신호를 주의 깊게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계 존 비중이 높다. 내진도 마찬가지다. 자연분만에선  시간에  번꼴로 내진을 하지만, 자출에선 산모가 원하거나, 혹은 담당 의료인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만 내진을 한다. (내진은 자궁문이 열렸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의사가 손가락을  안에 넣는 행위이다. 분만을 위해선 자궁문이 10cm 정도 열려야 하고, 보통 2-3cm 열리기까지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린다.)


이 외에  분만법의 가장  차이를 꼽으라면 아마 남편의 역할일 것이다. 자연분만에선 남편의 역할이 딱히 없다. 물론 진통을 같이 견뎌주고 정신적으로 힘이 되어주는 것도  역할이지만, 남편 없이도 분만은 가능하다. 하지만 자출에선 남편이  둘라이다. 둘라의 역할은 산모에게 정신적 그리고 신체적 도움을 주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자연분만과 크게 다를  없어 보이지만, 조산사는  차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자연분만이 100m 달리기면, 자출은 마라톤이다. 최대한 약을  쓰고 산모의 육체적 본능을 따르니 그만큼 오래 걸린다. 짧으면 7시간, 길면 꼬박 48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산모와 함께 호흡하고, 운동과 스트레칭을 도우며, 산모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지원하는 것이 둘라,  남편의 역할이다. 섣불리  역할을 자처했다 오히려 산모에게 도움은  되고 관계만 틀어지는 경우를 여럿 봤다고 하셨다. 그러니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며, 만약 자신이 없으면 고민 말고 전문 둘라를 고용하는    현명한 선택이라고 강조하셨다. 남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겁을 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얘기를 듣고 나니 무조건 내가 해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으로 태어나 출산 임무에 강제징용된 아내를 혼자 전쟁터에 두고  수는 없다. 총은  쏘더라도 옆에서 탄띠 보급은 해야 한다. 아내가 지금까지 임신에 할애한 시간과 에너지만 생각해도 그는 이미  몫을  하고도 남았다. 그러니 마지막 48시간이라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지분을 조금 챙기고 싶다.  순간을 아내와 함께 견디고,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을 목도하고, 엄마와의 스킨십을 마친 아이를  가슴에 품고 싶다. .


조산사님과의 상담   가지 의문이 생겼다. 지금까지 들은 얘기는 모든 예비부모가 알면 좋은, 아니 마땅히 알아야  내용인데,   주옥같은 얘기를 자출 전문 산부인과에서 조산사 면담을 신청해야만 들을  있냐는 것이다. 출산을 앞둔 이라면 무통주사를 받든  받든 무통주사의 효능과 부작용을 알아야 하고, 제왕절개를 하든  하든 제왕절개를 하는 이유와 장단점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산모마다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다를 테고, 감내할  있는 고통의 총량이 다를 테며, 선천적 성향과 건강 상태가 다를 것이다. 따라서 천편일률적인 분만법을 들이밀 수는 없다. 하지만 분만법과는 상관없이 예비부모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정보가 높은 장벽 뒤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예전 기타 선생님이 “기본기나 잘해라는 말로, 그리고 헬스장 트레이너가 “오늘은 가슴  거예요라는 말로 모든 소통을 대신했던 것처럼, 물어봐야 겨우 알려주는 식의 인색한 진료는 걱정하는 산모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불안을 부추길 뿐이다.


병원을 나서는데 조산사님이 하신 말 한마디가 머리에 맴돌았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태교는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거나 태교여행 투어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 가장 좋은 태교는 엄마와 아빠가 행복한 것이고, 둘 모두가 만족해하는 분만 환경에서 아이를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의료 개입 없는 전통방식에 마음이 끌리는 자출파들도 있을 테고, 첨단장비와 현대의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자연분만파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최대한 많이 알아보고, 장단점을 저울질한 후,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병원을 옮기기 전까지 두려움에 떨던 아내도 조산사와의 만남 후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다. 분만도 분만이지만, 몰라서 두려운 것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전 주치의와 삐걱거렸던 시간, 그리고 느지막이 다른 산부인과를 알아보며 갈팡질팡했던 마음이 끝내 보상받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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