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제30주
미필과 예비아빠 사이엔 뜻밖의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해당 신분에 편입됨과 동시에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 아킬레스건은 그 어떤 갑옷으로도 보호할 수 없으며, 당사자를 삽시간에 무장해제 시키는 고약한 약점이다. 미필의 경우 “군대 안 갔으면 짜져 있어”가 그것이고, 예비아빠의 경우 “9개월 동안 애 니가 달고 다녔어?”가 그것이다. 이 짧은 말 한마디 앞에서는 그 어떤 견고한 논리도 구멍 난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군대에 안 간 자에겐 현역의 말이 진리이고, 임신을 안 한 자에겐 아내의 말이 법이다. “나도 훈련소는 갔다 왔는데”라든지, “나도 옆에서 힘들었는데”와 같은 주절거림은 씨알도 안 먹힐뿐만 아니라, 당사자를 한없이 구차하고 초라한 인간으로 만드는 역효과를 낳는다.
난 사회복무요원(공익)으로 집 근처 중학교에서 2년간 복무했다. 그럼에도 앞서 나 자신을 미필로 칭한 것은 현역의 분류체계를 따랐기 때문이다. 현역은 공익, 면제, 방위를 구분 짓지 않는다. 현역에게 이들은 모두 ‘미필’일 뿐이다. 다른 공익들은 군필들 사이에서 어떤 존엄한 대우를 받는지 모르겠지만, 난 군대 얘기만 나오면(무조건 한 번은 나온다) 결혼한 친구들 사이에 낀 솔로처럼 붕 떠오르는 무중력 존재가 되었다. 조용히 입을 닫고 이 의미 없는 대화가 빨리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으면, 눈치 빠른 친구 하나가 “어이 공익”하고 날 불러 세우는 쓸데없는 관심을 베풀곤 한다. 간혹 훈련소 관련 얘기는 그나마 건드려볼 껀덕지가 있다고 판단하여(공익도 훈련소는 간다) 한마디 보태기라도 하면, “에이, 너 군대 안 갔잖아”라는 거의 자동반사적 차단에 막히기 일쑤다.
그렇다고 내가 서운함이나 소외감을 느낀다는 얘기는 아니다. 차라리 현역으로 다녀와 대화에 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2년 동안 열심히 삽질하고 온 친구들에게 잠시나마 웃음거리가 되어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한번은 내가 한술 더 떠서 앞으로 군대 얘기가 나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 군대를 안 갔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자진신고하겠다고 했다. 친구들이 깔깔대며 좋아했다.
그렇다면 예비아빠의 아킬레스건은 무엇인가. 부부가 9개월이란 시간을 같이 견뎠다 해도(우린 아직 2달 남았지만 앞으로 크게 달라질 거 같진 않다), 배를 움켜쥔 아내 앞에선 난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일 뿐이다. 현역과 미필의 역학관계처럼, 남편에게 산고란 불가침의 영역이다. 한번은 “애 니 배 속에 있어?”라는 말이 하도 억울해서 이런 상상까지 해봤다. 먼 미래에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임신을 남녀가 번갈아 하는 것이다. 자궁 대신 체외 발육기 안에서 태아를 길러, 한 사람이 하다가 힘들면 배우자에게 바톤터치하는 식으로 사이좋게 발육을 분담하는 것이다. 발육기 교체를 위해선 집 근처 산부인과를 방문하여 “저희 교체하러 왔어요~”라고 하면 직원이 “아 교체실로 들어가셔서 직접 하시면 돼요~”라고 하는, 마치 전기차 충전하듯 발육기를 떼었다 붙였다 하면 된다. (단언컨대 이런 미래에는 성차별이 없을 것이다.)
아내의 필살기를 맞고 억울함이나 섭섭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때때로 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려는 그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지난 7개월 남짓 아내의 임신을 지켜본 결과, 아무리 생각해도 여성 혼자 임신을 전담하는 건 진화론적 버그가 틀림없다. 진화란 곧 유전자 변이의 축적이고, 이엔 목적지향성이나 의도성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몸이라는 ‘제품’을 사용하는 유저 입장에서 이 점은 고객센터에 신고하고 싶은 불만사항이다. 가끔 집 근처 하천에서 오리떼를 보면 태생 대신 난생을 지향하는 그들이 그렇게 현명해 보일 수가 없다. 마치 “뭐하러 불편하게시리 몸 안에서 길러? 알 낳아서 밖에서 기르면 될 것을"라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난 오리가 될 수 없고, 그리고 내 신고를 받아줄 고객센터도 없다. 그저 이따금 아내에게 내 아킬레스건을 내주며 여생을 보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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