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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Jan 20. 2022

산부인과만 세 번째입니다

임신 제31주

‘포스’라는 단어가 조산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수백 번의 쪼글쪼글한 탄생을 목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 안에 담긴 우리의 모습은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한 번의 실패는 있을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두 번의 헤어짐 끝에 맺힌 게 많았던 우리는 작정하고 모든 걸 털어놓았다. 우리가 원하는 출산 방식부터 지난 두 산부인과에서 맞닥뜨린 문제들까지. 묵묵히 우리 얘기를 듣던 조산사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거 여기선 다 가능하구요. 31주시면 조금 늦게 오신 감이 있지만, 잘 하실 거예요.”


우리가 처음 산부인과를 옮긴 것은 24 차였다. 자연주의 출산(이하 자출) 하기 위해 옮긴  번째 병원은 자출도 하지만 일반분만도 하는 산부인과였다. 이곳에서 자출을  경우, 주치의에게 부인과 진료를 받고, 따로 배정된 조산사에게 자출 관련 상담을 받는다. 그러다 출산 당일엔 조산사와 진통부터 분만 직전까지 함께하되 마지막 분만은 의사가 하는 시스템이다. 당시 상담사의 설명을 들으며 조산사와 의사 간의 바톤터치가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고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일단 넘어갔다. 그땐 자출 조산사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했고, 분만은  미래의 일이었다.


하지만 예정일이   앞으로 다가오자 아내는 서서히 분만에 대한 공포감을 드러냈다. 조산사랑 잘하고 있는데 분만하러 들어  의사가 합을 깰까  걱정된다고 했다. 며칠  조산사를 만나 조심스레 이 얘기를 꺼냈다. 조산사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맞아요. 사실  저희 병원의 가장 큰 딜레마이긴 해요라는 다소 불길한 대답을 내놓았다. 자신이 출산 당일 당직인 의사에게 최대한  설명을 해놓겠지만, 의사마다 성향이 제각각이라 우리가 원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줄지는 장담할  없다고 했다. 상담실을 나온 우리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나름 용기 내어 찾아온 이곳이 우리에게 맞는 병원인지 더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실컷 조산사와 팀워크를 발휘하여 진통을  견뎌냈다 해도, 분만에 투입된 의사와 합이 맞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있었다.


우리가 병원을 옮기면서까지 자출을 고집해 온 이유 중 하나는 회음부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회음부는 질과 항문을 잇는 신체부위로, 이곳을 절개하여 질입구를 넓히는 수술을 회음부 절개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산모 중 85%가 분만 과정에서 회음부 손상을 입는데, 가벼운 1도 손상부터 질과 항문 사의의 근육이 파열되는 4도 손상까지 그 정도의 차가 크다. 과거엔 절개술이 더 큰 회음부 손상을 예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권장해왔으나, 90년대 이후로는 그 효험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데에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이는 추세다.(절개가 꼭 필요한 상황도 있다.) 예를 들어 CMAJ(캐나다의학협회학술지), BMJ(영국의학학술지), Cochrane Library(코크란라이브러리), 세계보건기구 등에서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회음부 절개가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근거가 충분치 않고, 그 타당성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내 주변엔 출산한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회음부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아 괴로워하는 친구들이 있다. 절개부위가 수시로 감염되어 앉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친구부터, 요실금 때문에 패드가 외출 필수품이 되어버린 친구까지, 출산과 함께 삶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다. 워낙 활동적이고 스포츠쪽 일을 해왔던 아내 역시 회음부 절개로 인해 자신의 커리어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치명상을 입을까  두려워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뿐이고, 실상은 의사와 합도  맞고 순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험의 소지를 구태여 배제하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들에게만 허락된 사치이지 않을까.   번의 수술로 여생의 행불행을 좌우된다면, 나였어도  악물고  나은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만약 조산사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은 의사가 자출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부족하여,  필요한 상황이 아닌데도 회음부 절개를 부추긴다면, 그건 우리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을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조산사가 알아볼 만한 병원 두 군데를 추천해줬다. A와 B 둘 다 조산사 주도의 자출을 하는 곳인데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었다. A라는 곳은 조산원과 부인과가 분리되어 있어, 만약 분만 중 의료개입이 필요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점과, 무통주사를 아예 취급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반면 B라는 곳은 분만 내내 의사가 상시 대기하는 시스템으로, 언제든 의료개입을 요청할 수 있었다. 또한 B는 일률적으로 무통주사를 권하진 않되, 원하는 산모에게만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우린 자출을 지향하지만 의료개입이라는 선택지를 열어두고 싶었기에 B를 가보기로 했다.


B에서 만난 조산사의 ‘포스’에 매료된 우리는 그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음을 굳혔다. 이곳이라면 산부인과 찾아 삼만리에 종지부를 찍어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병원에 전화해 진료 예약을 잡고, 지나온 7개월을 되돌아봤다. 낯설기만 했던 산부인과라는 세계가 점점 익숙해졌고, 진료 횟수가 찰수록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두려워하는지도 뚜렷해졌다. 자연주의 출산, 무통주사, 회음부 절개, 유도분만 같은 단어들을 하나둘 배워갈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그만큼 깊어졌다. 이제 31주라는 시간을 굽이굽이 지나 도착한 이곳에서 베일리를 맞이할 것이다.



회음부 절개 관련 자료 출처:

https://www.cochrane.org/CD000081/PREG_selective-versus-routine-use-episiotomy-vaginal-birth

https://doi.org/10.1136/bmj.320.7227.86

https://www.cmaj.ca/content/191/42/E1149#ref-23

https://books.google.co.kr/books/about/WHO_Recommendations_on_Intrapartum_Care.html?id=hHOyDwAAQBAJ&redir_es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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