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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Feb 14. 2022

1000만 명이 다르게 보이는 경험

임신 제36주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배가 아메리카 대륙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해안을 걷던 원주민들은 다가오는 배를 볼 수 없었다. 그 거대한 물체가 코앞까지 이르러서야 무리 중 한 명이 배를 가르켰고, 그제서야 다른 이들도 배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인 이 얘기의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보지 못한다. 여기서 보지 못한다는 건 추상적인 상상뿐만 아니라 뇌가 물리적으로 물체를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원주민들의 세계관엔 ‘배’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관념을 형상화할 수도 없었다. 마치 착시그림을 누군가가 설명해줘야 비로소 피화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원주민들 역시 누군가가 배를 콕 집어 가르킨 후에야 눈앞의 사물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주민들이 배를   없었듯, 지금의  역시 ‘아빠됨이란 관념을 헤아릴  없다. 이것은 마치 내게 500광년 떨어진 은하계에 있는 팔라풀리푸라는 작은 행성에 사는 둘라빨라삐 문명의 자손들이 가지고 노는 츄츄쵸쵸라는 장난감을 떠올려 보라고 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이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 봐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이마저도 ‘은하계’, ‘행성’, ‘장난감같이 이미  세계관에 존재하는 관념들로 더듬어볼 , 이것이 실제로 아빠라는 세계를 측량하는  적합한 척도인지조차 지금으로서는  길이 없다. 결국 지금 내가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림의 시간을 지내는 , 그리고 아빠라는 세계의 문이 열리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아빠가 되려고 하니, 나보다 먼저 아빠라는 길을 걸었던 수많은 아빠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기대가 앞섰는지 두려움이 앞섰는지, 그 세계를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고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내가 아직 답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살아낸 사람들이 문득 궁금해진다. 예전엔 길을 가다 마주치는 아빠들을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아이의 코를 풀어주거나 무릎 꿇고 딸랑이를 흔드는 그들은 흡사 태어나기를 아빠로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아빠 노릇을 해내는 그들이 이제는 새삼 다르게 보인다. 지금의 내가 그렇듯 그들 역시 아빠라는 변곡점을 목전에 두고 온갖 잡다한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고 때가 오자 아빠라는 세상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세상의 일원으로 거듭났다. 이제 길에서 그들을 보면 등산 중에 하산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든다. 내가 이제 막 나서려는 길을 이미 저만치 걷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존경심이랄까.


병원에 가져갈 가방을 싸고, 모유수유 관련 유튜브 영상을 보고, 카시트를 설치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은 최대한 해놓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미리 준비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아빠됨도 분명히 그중 하나일 것이다. 배 속에 있던 생명의 울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면, 비로소 아빠라는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문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없다. 그 문은 지금 굳게 닫혀있을뿐더러, 열려 있다 한들 내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원주민이고, 그곳은 콜럼버스의 배니까. 하지만 문이 보이는 순간, 두려움을 한아름 안고 문지방을 넘어볼테다.



p.s. 1000만 명은 대한민국 총 가구수(2100만)를 2로 나눈 숫자입니다. 실제 아빠 인구를 계산하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이렇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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