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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Mar 13. 2022

부끄러움 끝에 아빠가 되다

임신 제39주

2분에 한 번씩 진통이 찾아올 때마다 아내는 손발을 덜덜 떨며 신음했다. 3년 동안 좁은 원룸에서 복닥거리며,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보여준 우리였지만, 곁에 누워 울부짖는 아내는 굉장히 낯설었다. 출산 중에 아내가 아파서 울거나 소리를 지를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것조차 고통을 키우는지, 그저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린 채, 손이 하얗게 창백해지도록 내 손을 움켜쥐고, 가냘픈 목소리로 “아…아…”거릴 뿐이었다. 그 동물적인 흐느낌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마 이때쯤이었을까. 이러다가 아내가 제왕절개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게. 내가 지금껏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견지해왔던 자연주의 출산의 당위성은, 사경을 헤매는 아내 앞에서 증발해버린 지 오래였다. 무통주사든 제왕절개든, 현존하는 모든 의술을 다 빌려서라도 그저 아내가 무사히 이 병실을 나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내와 함께 진통을 견디면서 가장 뚜렷하게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작년 5월부터 브런치에 올린 20여 편의 글들이 떠올랐다. 나름 집요하게 출산의 세계를 파헤치고, 꽤 많은 정보를 수집하면서, 최소한의 의료개입을 지향하는 자연주의 출산이 지상최고의 출산방식이라는 소신을 굳혀갔다. 자연주의 출산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무통주사-제왕절개 코스를 선택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산모에게도 좋고 아이에게도 좋다는 걸 마다할까. 의사가 좋다니까, 혹은 남들도 다 하니까, 와 같은 허접한 이유로 출산에 임하는 게 아닐까.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건방진 시선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내가 진통을 겪기 전까지 내가 염불 외듯 중얼거려온 말들, 무통주사를 맞으면 회음부 열상이 심해지니 어쩌니, 제왕절개를 하면 회복이 느리니 어쩌니 하는 얘기들은 이 고통의 시공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한가로운 입놀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아내는 무통주사를 세 차례 맞았고, 약발이 떨어지고 한참을 더 견뎌서야 자연분만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제왕절개를 하지 않고 큰 상처 없이 3.9kg의 덩치를 자랑하는 딸 베일리와 만났다. 출산 전의 나라면 아마 “자연분만에 성공했다”라는 표현을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출산 후의 나는 절대로 이 표현을 입에 담을 수 없다. 주사를 맞거나 제왕절개를 하는 것을 ‘실패’로 간주했던 과거의 내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고 무지했는지 이제는 안다. 지금 다시 성공을 정의하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산모와 아이 둘 다 건강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시공간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 라고.


베일리가 세상에 나오고 1주일이 지난 날 아내와 포옹을 했다. 9개월 만에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하는 포옹이었다. 아내의 배가 부르고 나서부터는 내가 옆에서 양손으로 감싸안는 시늉만 했지, 포옹 같은 포옹은 더이상 우리 둘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 9개월 만에 품에 안은 아내는 조금 핼쑥했고, 많이 야위었다. 우린 서로를 안은 채 말없이 울었다. 지난 9개월이 서로에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번갈아 북받쳤다. 울음을 멈춘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옆에서 색색대는 베일리를 바라봤다. 여태껏 우리가 함께 경험한 모든 것이 저 자그마한 생명을 일궈 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다. 하루를 대부분 자면서 보내는 베일리가 가끔씩 보여주는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앞으로 내가 이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껌뻑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했다.


-  (아니,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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