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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생각 Apr 26. 2022

아빠가 되어보니 말이야

3月 - 일수가 하리에게

하리,


이 편지를 쓰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어. 과연 이 편지가 독일에 있는 너에게 닿기까지 몇 명의 손을 거칠까? 족히 열 명은 되지 않을까가 내 추측이야. 편지에 칩이라도 달아서 확인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지금 내가 속한 '육아'라는 시공간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시공간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는 이유는 육아가 내 생활패턴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야. 2주 만에 삶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지 몰랐어. 줄스가 한창 임신 중일 때 너랑 통화하면서 말한 적 있었지. "아이가 태어나면 출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말고, 새로운 삶이 열린다고 생각하라"는 얘기를 책에서 읽었다고. 당시 사적 공간이 너무 줄어들어서 힘들어하던 내게 꼭 필요한 얘기였어. 근데 아이가 태어나보니까 이걸 단순히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받아들이기엔 좀 해도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싶어. 미안 편지 초반부터 너무 하소연 모드로 갔네.


베일리를 돌보면서 새로 알게 된 것들이 많아. 처음 베일리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땐 그 작은 몸뚱이가 꺼이꺼이하는 소리가 어찌나 서럽게 들리던지 마음이 좀 아프더라. 근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이게 서럽거나 억울해서 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아주자마자 울음을 뚝 멈추는 걸 보고, 아, 얘가 배고프다는 말을, 혹은 엉덩이가 찝찝하다는 말을 이렇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 이후로는 베일리가 아무리 서럽게 울어도 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더라고. 


요즘 '육아는 장비빨'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중이야. 오늘은 유축기 깔때기를 주문하기 위해 줄스의 젖꼭지 내경을 줄자로 쟀어. 이런 것까지 말해서 미안해. 진짜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막상 태어나보니 새로 공부하고 갖춰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더라. 줄스와 난 가급적 모유수유를 하려고 해. 분유 없이 모유만으로 아기 배를 채우려면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수유 간격을 잘 맞춰야 젖량 생산을 극대화할 수 있어. 내 입에서 '젖량 생산 극대화' 같은 말이 나올 줄은 진짜 몰랐다. 어쨋든 그러기 위해선 모든 걸 수유 스케줄에 맞춰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줄스와 내가 먹고, 자고, 씻고, 싸는 시간도 여기에 포함되지. 이게 육아에서 가장 힘든 점 중 하나인 것 같아. 안 그래도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정신이 혼미한데 내 모든 생활패턴이 타의에 좌우되니 짜증이 쌓이고, 자칫 그 짜증이 서로를 향하게 되면 그땐 싸움이 되는 거지. 


내가 너무 안 좋은 얘기만 늘어놨는데 행복한 일도 많아. 일단 베일리가 너무 귀여워. 너가 외모 얘기 싫어하는 거 알지만 조금만 할게. 베일리 얼굴을 보면 내 유전자를 가지고 해낼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기특해. 왜 예수 옆에서 나팔 부는 꼬마천사들 있잖아. 딱 그렇게 생겼어. 그리고 얘를 안고 있으면 나도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게 있어. 덴마크인가 어디 북유럽 나라에서(좋은 거는 얘네가 다 해먹지) 학생들 대상으로 아기 돌보는 수업을 했는데, 그 결과 애들이 전반적으로 온화해졌고 인성이 나아졌대나 뭐래나. 특히 좀 삐딱한 애들이 효과가 제일 컸데. 돌봄치유 같은 말도 그래서 있나봐. 나도 비슷한 느낌이야. 우는 베일리를 달래고, 먹이고, 똥기저귀 갈면서 내가 미세하게나마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어. 약간 담마센터에서 봉사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런 게 있고, 또 하나는 줄스랑 나 둘이었던 관계에서 셋이라는 새로운 집합체가 된 느낌도 빼놓을 수 없지. 우리 둘 사이에 베일리를 눕히고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 하면서 놀 때면 기분이 아주 묘해. 솔직히 말하면 아직 내가 아빠가 됐고, 우리 셋이 가족이 됐다는 사실이 잘 와닿지 않지만, 가끔씩 와닿을 때가 있어. 그 찰나찰나가 참, 뭐랄까, 행복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해. 결론은 아직 잘 모르겠다인 거 같아.


독일에 있는 너 역시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겠지. 비록 난 한국에 남아 있지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우리가 이 편지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참 잘한 일 같아. 편지 쓸 생각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상념과 감정에 더 집중하게 되더라. 너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난 요즘 명상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실제로 아침마다 명상한 지는 벌써 1년도 넘었지만, 그래도 한때 열심히 해놨기 때문에 지금 같은 때에 써먹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졸려 죽겠는데 베일리가 젖병을 물고만 있고 빨지 않을 때, 10분 동안 기저귀를 세 번 갈아야 할 때(아까 쌀 때 같이 싸지 왜 두 번 일하게 만들어?), 그럴 때마다 호흡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내 안에서 피고 지는 생각들을 관찰하려고 해. 너도 익히 알겠지만 잘 안될 때가 많아. 아니지. 잘 되고 안 되고도 또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 ㅋ


우린 엄빠집에서 일주일 정도 더 있다가 순천으로 내려갈 계획이야. 내려가기 전에 이 편지를 부치고 가려고. 왠지 순천에서 부치면 더 오래 걸릴 거 같아서. (내가 너무 비수도권 무시하나?) 그리고 드디어 4/1로 이사 날짜를 잡았어. 집 알아본다고 강릉이랑 양양에 다녀온 날부터 치면 거의 1년이 걸렸더라고. 다음 편지는 무려 내 '서재'에서 쓰게 될 예정이야. 한 달 후면 너도 나도 새로운 환경에 조금 더 적응했겠지. 그때까지 또 잘 버텨보자고. 건강하고.


일수

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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