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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Dec 25. 2023

백수 한달살이 후기

노동이란?

  지난 10월 말 나는 퇴사를 했다. 다음 직장으로 어디를 갈지 정해두지 않은 채로 퇴사를 했다. 직무 스트레스, 모두가 남 뒷담을 하는 인간관계 스트레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스트레스, 내가 이러려고 중고등학생 때 탈모 격화되며 공부하고 대학생 때 번아웃 와가며 대외활동과 고학점을 취득했던 걸까 스트레스 등 모든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나는 "안녕히 계세요~"하고 뉴스에 나오는 MZ들답게 퇴사를 했다.


  사실 백수를 하고 싶기도 했다. 나도 통계청에서 발표했던 2030대 '쉬는 청년'(구직도 알바도 안 하는 인구 카테고리) 60만 명 중 한 명이 되고 싶었다. 나를 대책 없이 잉여적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몇 달의 생활비로 쓸만한 돈은 통장에 있었다. 대학교 졸업 이후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번뇌, 고민, 질문들, 특히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싶어 격렬히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퇴사하고 며칠은 행복했는데 통장에 돈이 말라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바로 당근마켓으로 알바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근마켓 알바는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다. 공고가 올라오자마자 다 마감되었다. 나 같은 청년 백수가 많은 걸까? 코로나로 인해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자영업자 및 실직자 분들이 알바를 하는 걸까? 놀람에 놀람을 계속하다가 알바몬도 들어가서 하루짜리 단기알바들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단기알바 자리들을 구했다. 종종 인천공항에 물류 일을 하러 가거나, 용역업체 통해서 호텔 알바(설거지/식기세척/리셉션 업무)를 하러 갔다. 1주일에 이틀 가량 일을 했다.


  단기알바에서 정말 다양한 사연들을 마주했다. 자영업에서 일하다가 (벌이가 시원찮은 건지) 아내에게 맡기고 알바하러 온 아저씨, 투잡 뛰는 내 나이 또래, 운동선수인데 평일에 일하러 온 남성,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성적이 너무 안 나와서 패배감에 젖어있던 23살 남성, 친구들과 여행 갈 돈 벌려고 온 고등학생들, 공부방을 운영하시다가 코로나 이후로 경기가 안 좋아져서 단기알바에 나오신 분 등등... 진짜 각양각색이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 명당 영화 한 편씩 찍고 있는 것 같아서 상당히 인상 깊었다. 


  그리고 용역업체 사람들이 너무 재수 없었다. 싸가지없고 신경질적이었다. 지들이 뭔데..? 호텔에서 일할 때 산업재해라도 발생하면 호텔은 자기네 직원 아니라고 말할 것 같고, 용역업체는 우리 소속이지만 우리 사업장 아니라고 발뺌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참...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실망스러웠다. 노동안전망 바깥으로 나가면 이렇게 비인간적 대우를 받게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노동양극화가 심한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불안정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데 이런다고..? 하...


  동시에 이렇게 단기알바를 하며 생애 처음으로 '노동이란 자아실현이기 이전에 생계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삼시세끼 밥을 먹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 나의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걸까?'라는 큰 질문 중 작은 부분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라는 말 또한 더 격하게 이해 갔다. 인간은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다. 하면 할수록 행복할 수 있는 노동을 하는 것이 최고다. 그런 일이 없다면 다소 호감이라도 있는 일을 하는 게 좋다.


  이전까지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라'라는 말들에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을 좋아하지?'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이 말의 본래 의미를 깨달았다. 본래 일은 자아실현이기 이전에 생계다. 조금이라도 내가 호감이 가는 일, 내가 뜻이 있는 일을 하면 된 거다. 그 이상의 '내가 진짜 100%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지?'라는 고민은 유의미할지 몰라도 내게는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그저 방향성만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너무 고상하게 자랐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대학생 때까지 부모님 그늘 밑에서 용돈 받아가며 너무 아이처럼 살았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 내가 잘 자라길 바래하시며 잘해주니까 나는 자아가 비대해지고 내가 뭐라도 된 것 마냥 생각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부모님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을 원천 봉쇄하고 이렇게 백수생활까지 해보니 노동의 가치, 나라는 사람은 겸손하게 살아야 함, 부모님께서 나를 잘 키우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는 사실들을 너무나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양한 경험, 다양한 사색들을 하며 나는 좀 더 성장했다고 느낀다. 12월부터는 내가 호감이 있는, 뜻이 있는 분야의 기업에 취직해 열과 성을 다해 노동을 하고 있다. 성장하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그렇게 나와 세상을 좀 더 알게 된 백수 한달살이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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