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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현 Sep 06. 2023

도마뱀, 10

아홉 겹

  너도 꼭 너처럼 고집부리는 사람 만나 봐야 해.





  언젠가 다이어트를 한다며 가방에 챙겨 온 바나나를 한 입 물어 맛을 본 애인이 끝을 조금 자른 후 내 입에 넣어주며 말했었다. 실은 이전에도 몇 번인가 핀잔처럼 했던 말이었고, 나는 내가 고집이 센 편은 전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말에 약간 반발심이 생겼다.





  내가 뭐. 거의 다 응이라고 해 주잖아.

  그 점이 제일 문제야. 대답은 응~ 해 놓고 행동은 결국 네 마음대로 하잖아. 그럴 거면 응이라고 하지를 말던가, 어휴, 속 터져.





  그것은 아니라고 하기 어려운 부분이기에 입을 다물었지만, 역시나 슬그머니 반항심을 혀 한 켠에 품고 있었다. 자기는 뭐, 대단히 내 말을 수용해 주는 줄 아나. 아주 사소한 마음이었고 그보다는 애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컸기 때문에 그 자그마한 틈새가 우리를 완전히 갈라놓을 것이라고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





  결혼 준비 중단 선언 후 이틀은 화가 났다. 프라이팬, 겨우 프라이팬이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워낙에 소탈한 것이 매력이었던 그녀가 자그마치 사십만 원이나 하는 프라이팬이 가지고 싶어 이리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아마 그냥 결혼 전에 내 기를 꺾고 싶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리라 싶어 나도 지지 않으려 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하루에 휴대폰을 수십 수백 번씩 들여다보면서도 절대로.





  삼 일째 되던 날 아침, 습관처럼 눈을 뜨자마자 본 휴대폰의 메시지함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마음이 커다랗게 일렁였다. 그깟 사십만 원이 뭐라고, 그냥 마음대로 사라고 할 것을 그랬나. 겨우 프라이팬인데, 명품 가방 열 개를 사달라 억지를 부린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지나쳤나. 그냥 기 좀 잡혀 줄 것을 그랬나. 그렇지만 결혼 전부터 벌써 이러면 결혼해서는 얼마나 더 심하게 나를 잡으려고....... 그런데 뭐, 그러면 또 어떤가. 남자는 모름지기 여자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아버지도 그러셨는데.......


  하루를 꼬박 고민하고 잠자리에 들며 생각했다. 내일은, 그 프라이팬을 사도 좋다고 해야지. 그리고 혹시 원한다면 그 옆에 있던 오만 원이 더 비싼 냄비까지도 사도 좋다 허락해 주어야겠다. 그 정도면 애인도 충분히 했다 싶어질 것이고 내가 제게 쩔쩔매는 모습에 만족스러움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느 남녀들이 그렇듯, 내가 져주고 넘어가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착각의 밤이 깊었다.





-





  


  내가 가진 오만함은 인간의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가지는 비인간적인 감정들 중 하나인가. 비인간적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우습기가 짝이 없다.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오롯이 인간뿐이므로.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헤어지는 것은 프라이팬 때문이 아니라 프라이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나 때문이라고. 고작 그것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고작 그것조차 안 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을, 사소한 것을 가지고 드잡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그녀는 견딜 수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멈추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그 말이 와닿지 않아 나는 눈꺼풀만 끔뻑, 끔뻑, 끔뻑, 끔뻑, 열었다 닫았다.





  좋은 사람 만나.





  그녀가 붉어진 눈을 길게 접으며 웃었다. 그보다 더 선명히 붉은 칠을 한 입술을 벌려 나를 산산이 부순다.





  나보다 좋은 사람은 말구.





  으흐흐, 장난스러운 그 콧소리가 여태 밉지 못하고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그 하얀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가슴속에 차가운 겨울 공기가 가득 들어찬 듯 아리는 것이 버겁다. 숨 쉬는 것이 고통스럽고 내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된 듯하다. 콧잔등이 따갑고 눈두덩이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소연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목구멍에 주먹 만한 핏덩이라도 걸린 듯 비린내가 나고 목이 메어 그녀의 이름조차 간신히 내뱉었다. 두 개 물줄기가 뺨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무엇인지 의식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내 얼굴을 문지른다. 그제야 그것이 내가 쏟아버린 슬픔인 것을 알았다.





  잘 지내, 내가 많이 사랑한 장헌수.

  소연아.

  그리울 거야. 얼마간은 후회도 할지 몰라. 미친 척 찾아가 빌고 싶어질 거야. 없던 일로 하자고,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어질 거야. 밤에는 잠들기가 두려워질 거고, 아침에 눈을 뜨면 너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워지겠지....... 너도 아마 그럴 거야.

  소연아, 제발.

  그런데 견딜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단단하다.





  네가 보고 싶어 지는 걸 피하지 않을 거고, 괴로운 마음 잊으려구 술에 기대지도 않을 거야. 눈물이 날 때는 사람이 꽉 찬 버스 안이어도 그만 울어버릴 거고 못해줘서 아쉬운 일도 함께 행복했던 일들도 많이 생각하며 마음 아파할 거야.





  환히 웃는 그녀의 눈에 굵은 물열매가 열린다.





  너를 떠올려도 웃으며 그때 참 좋았지, 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그렇게 할래.





  지나치게 무르익은 과실이 삽시간에 바닥으로 떨어진다. 수확해야 할 때를 지나친 그들이 으레 그렇듯이 부서지고 뭉개져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진다.





  너도 그렇게 해.





  그녀가 내 손을 포개어 잡고 두어 번 톡톡 손등을 두드렸다. 잠시간 눈을 깊이 마주하고, 슬픔을 알지 못하는 듯한 그녀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내 왼손을 뒤집어 손바닥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우리, 그렇게 하자.





  잘 지내라는 인사도 없이 그녀가 멀어진다. 뿌옇게 닳아간다. 세상에 너보다 좋은 여자가 어디에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는 내 마음은 듣지도 못한 채, 그렇게 내 인생의 반쪼가리는 훌쩍 나를 떠나버렸다. 곧 말라 사라져 사람들이 발자국을 남긴 후에는 있었는 줄도 모를 흔적만을 남긴 채 영영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영영, 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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