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연과 연인이 된 지 두 달을 갓 넘겼을 때 우리는 양가 부모님과 함께 마주앉았다. 상견례였다. 둘 다 삼십 대니 미룰 것이 없다는 그녀와 나의 부모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나와 비슷하게 서울 상위권 대학을 나와 비슷한 공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그녀를 내 부모님은 무척이나 미더워하셨다. 소연과 이별한 지 일 년, 그 사이에 그녀는 내게만 아주 약간 남고 다른 이들의 세상에는 없었던 존재처럼 잊혀져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불은 해서 보내게 해 주셔요. 이렇게 멋진 아드님을 사위로 주셔서 저희가 너무 감사해서 그렇습니다.
아유, 저희야말로 이렇게나 고운 딸아이를 가족으로 맞게 되어 사돈내외께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나는 우리 엄마가 저렇게 고상한 말투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첫 번째 상견례에서는 없던 겉치레가 오고 가는 동안 나는 싹싹한 사내 흉내를 내며 어른들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체를 했다. 그것이 연인의 눈에도 마음에 들었는지 눈이 마주칠 때면 그녀는 소리없이 입을 크게 당겨 웃었다. 나도 마주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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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서 이렇게 허례허식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다. 결혼 과정에서 우리는 양가 어머니들의 손을 붙들고 한복을 맞추고, 아버지들을 따로 모셔 정장을 맞추어 드렸다. 우리 어머니는 예비 아내가 요청한 적이 없는데도 종로에서 품질보증서를 단 다이아로 된 목걸이와 귀걸이, 반지 세트를 예물로 보냈고, 예비 아내의 어머니께서도 기다렸다는 듯 명품 브랜드의 시계를 돌려보내셨다.
부모님이 평생을 열심히 모으셨을 돈에 내가 몇 년 안 되는 직장 생활 동안 모은 자금, 그리고 약간의 대출을 받아 서울 외곽의 24평짜리 집을 구매하겠다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날에는 이유 모를 벅참과 불안함이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혼자서 꿋꿋이 그리고 꼿꼿이 어른이 되었다 생각한 나는 여전히 내가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어린 파충류인 것이 사뭇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손길을 거절하기에는, 지금의 반의 반쯤 되는 집조차 내 능력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죄책감은 연인과 함께 사용할 가전과 가구를 고르면서 슬그머니 잊혀졌다. 텅 빈 공간이었던 곳을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한 후 단정한 아파트로 만들고, 깔끔한 새 가전과 가구들이 들어차고 찬장에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예쁜 새 그릇들을 채워 넣으며, 연인과 숟가락 하나까지 함께 골라 사람이 사는 집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었다.
그 즈음, 나는 야경으로 유명한 식당 창가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연인에게 프러포즈링을 끼워주었다. 서양에서 프러포즈 반지는 석 달 치 월급을 털어서 사는 것이라고 하던데, 거기에는 택도 없는 저렴한 것이지만 여자는 프러포즈를 받을 줄 몰랐다며 마냥 좋아라했다. 이미 함께 결혼반지를 맞추었던 덕에 반지는 여자의 네 번째 손가락에 꼭 맞았다.
밝지 않은 조명에 손을 뻗어 반지를 비추어 보는 여자의 눈이 그 손에 끼워진 7부 다이아만큼 반짝였다. 이상하게도 이 장면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듯한 기분이 든다. 연애한 지 8개월이 되던 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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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결혼식 이후 항상 결혼 반지와 프러포즈링 두 개를 모두 끼우고 다녔다. 심지어 누군가의 결혼식 등에 가는 날에는 예물로 받은 반지까지 모두 세 개를 왼손 약지에 끼웠다. 그럴 때면 아무리 길고 늘씬한 그녀의 손가락이라도 한 마디의 반절이 넘게 가려져 버거워보이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한두 개만 끼는 쪽이 훨씬 어여뻐 보였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아내의 허영을 채워주어야만 좋은 남편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자꾸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녀에게 그런 것은 다 허세라고 지적하기에는, 그녀가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누군가 어쩌다 그녀의 손을 보면(보지 않기에 너무 거대하기도 했지만), 꼭 반지에 대해 물었고 그녀는 꼭 이 반지는 결혼반지이고 이 반지는 남편이 깜짝 프러포즈를 해주었을 때 해준 다이아 반지이고, 이 반지는 어머님이 제가 됐다고, 괜찮다고 한참을 만류했는데도 굳이굳이 해주고 싶다며 해준 다이아 세트에 들어있던 반지라고 줄줄 읊고는 했다. 상대가 호응을 잘 해주는 것 같으면 우리 어머니가 해 준 예물 반지의 다이아 보증서의 이야기까지도 이어졌다. 나는 그것이 부끄러웠지만 고마웠다. 부끄럽지만 고맙다는 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항상 같은 가방을 들었다.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떠날 때, 면세점에서 양가 어머니께 명품 가방을 하나씩 드려야겠다며 고르는 그녀에게 넌지시 자기도 하나 골라, 해서 샀던 것이었다. 아내는 입으로는 됐다 말하면서 눈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굴렸다. 데자부 같은 광경에 나는 괜스레 옆에 있던 갈색 핸드백을 들어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이건 어때? 네가 늘 들고 다니던 가방이랑 비슷한 디자인 같은데.
그거, 취향이라서 들고다닌 것 아니구 친척언니가 준 거라 그냥 쓴 거야.
아내는 무엇이 우스운지 함박 웃음을 머금었다가 분홍색 작은 가방을 집어들었다. 이건 어때? 내가 권했던 가방보다 육십만 원이 저렴한 것이었다. 어떤 대답이 정답일까 잠시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통스탠 프라이팬이 스쳤다.
좋아. 뭐든 네가 고른 게 제일 예쁘고 좋아.
뭐야, 그게.
아내의 작은 주먹이 내 가슴을 아프지 않게 한 번 통 쳤다.
아내는 그때 산 그 분홍색 가방을 참 열심히도 들었다. 특히 반지를 세 개 끼는 날이면, 아내는 반드시 그 가방을 들었다. 자그마해서 립스틱 한 개, 휴대폰, 지갑밖에 들어가지 않는 그 자그마한 가방을, 그녀는 꼭 로고가 밖으로 보이게 신경써서 들었다. 누가 가방이 예쁘다고 말하면 꼭 아니, 나는 괜찮다는데 우리 신랑이- 하는 말로 너스레를 떨 준비를 해 가면서. 그 쓰잘데없는 행동은 자꾸만 아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