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을 두 해 앞두고 어머니를 잃었다. 치매 증상으로 인해 요양병원으로 모신 지 사 개월 만의 일이었다. 사 개월. 늘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던 어머니셨지만, 사 개월은 지나치게 짧았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얼마나 길어야 마음의 준비가 되었겠느냐만은....... 아무튼, 어쨌든 사 개월은 너무 짧았다. 서운했다.
어머니는 스물한 살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 나를 낳았다. 나는 딸을 기르며 서른이 넘은 딸도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데 어머니는 대체 얼마나 어리고 여렸을지를 생각했다. 앞이 캄캄했다. 어머니는 이모 집에 의탁해 아이를 낳고 일 년 가까이 몸을 추스르고 나서야 원래 부모님과 살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어린 나를 먹이고 입혀 길러내었다. 어머니는 키가 겨우 백오십에 젊었을 적 허리가 십구 인치였던 적도 있었을 만큼 아주 작은 체구에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도 없이 혼자서 아들을 기르고 일을 다니며 버텨낸 세월이 억울하지도 않은지,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너는 혼자서 컸어.
나는 의젓한 어린이였다. 좀처럼 무엇을 사달라 해달라 조르지 않고, 저학년 때부터 책가방을 스스로 챙기며,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제 방 청소를 스스로 하는 것을 당연하게 알았다. 반찬 투정도 없고 잔소리 없이도 알아서 공부를 척척 하던 똑똑하고 성실한 아이.
부모를 잘 만났으면 더 크게 되었을 텐데......, 그게 늘 미안하고 가슴이 시려.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실 때면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딴청을 부렸다. 눈알을 데록, 데로록, 굴리고 있으면 귀여워하셨던 것도 같다. 어머니의 말은 대체로 옳았고 어머니가 나를 '혼자서 큰 아이'라고 말씀하셨기에 나도 내가 혼자서, 알아서 잘 큰 것으로 알았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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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는 것은 절대 혼자 태어나 혼자 자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비의 땀으로 잉태되고 어미의 뼈와 살을 파먹고 태어나 제 부모의 골수를 달달 달여 먹고 자라야 하나의 사람이 된다. 어머니는 나를 혼자서 키웠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대신 어머니의 골을 두 배로 우려먹고 자란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어머니께 대신 내 골을 바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내 골을 가져간 아이들이 둘이나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만든 생명들을 지켜야 했고 어머니는 다시 뒷전이 되었다.
꼬박 삼사십 년을 바쳐 아이들을 길러내 내보내고 어머니를 돌아보았을 때,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미 가득 노쇠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은 그런 어머니의 곁에 같은 시간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어머니보다는 덜 쇠해보였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비슷하게 노인으로 보이는 것이 내가 어머니의 양수부터 시작하여 그의 모든 것을 빨아먹었기 때문이라고 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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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어머니를 뜨거운 불 속에 집어넣고 기다리는 두어 시간 동안 아버지는 온몸을 떨며 흐느꼈다. 숱이 거의 없어 붉게까지 보이는 백발 노인이 화장장 입구에 웅크리고 앉아 우는 광경으로부터 나는 부유감을 느꼈다. 내 두 발이 땅에 붙어있질 않은 것 같은 부유감, 이 세상과 내가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만 같은 부유감, 내 심장이 공중에 떠서 내 몸을 거부하고 있는 것만 같은 부유감. 나는 하늘로 내팽개쳐지지 않기 위해 아버지 곁에 앉아 그 손을 잡았다. 아버지에게 어떤 위로도 건네지 않았고, 아버지 또한 내게 어떠한 격려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았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태어난 지 두 해를 넘기지 않은 승호의 딸아이가 잠들었을 때, 고요를 이기지 않으려는 듯 작고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너를 처음 만나던 날에, 나는 네가 당연히 딸인 줄 알았다.
...... 그러셨었죠. 분홍색 커다란 리본 달린 초콜릿 박스 들고 오셨던 것 기억나요.
아버지가 빙그레 웃었다. 열아홉 가을이 눈앞에 선연하여 그때의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낯선 주름이 가득 드리워진 것이 왠지 어지러웠다. 아버지도 내 얼굴에서 열아홉의 나를 보고 있을까, 그리고 내 얼굴에 묻은 낡음을 어지러이 여기고 있을까?
수미 씨가 내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데, 당연히 수미 씨를 닮은 딸일 줄로 알았어. 왜 당연하게 그리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는데, 글쎄 막상 너를 보니까, 네가 수미 씨를 닮은 딸이 아니라 나를 닮은 아들이더구나.
아버지의 목구멍에서 쇳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새었다. 나도 웃었다. 아버지가 주름이 접혀 잘 보이지 않는 눈동자로 나를 분명하게 응시했다. 그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왠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이 보여 잠깐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맞닿아 있던 무릎이 문득 의식되었다. 그러나 굳이 다리를 오므려 그 체온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아버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명치가 뜨끈해졌다.
아버지는 창밖을 멀리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내려놓았다. 나를 품은 어머니가 말도 없이 갑자기 증발해버렸던 일, 대학을 졸업할 때가 다 되어서야 그 이유가 할머니의 반대 때문이었다는 걸 알았던 일, 그 때문에 아버지가 크게 분노하여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겠다 선언하고 부모와 크게 싸우고 절연할 뻔했던 일, 십오 년이 흐르고서 현장 감사를 나간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던 어머니를 우연히 마주쳤던 일, 어머니와 다시 연애한 지 일 년 만에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던 일과 그제야 어머니가 나의 존재를 털어놓았던 일.......
알자마자 당장 너에게 가야 한다고 했지. 사과해야 한다고 했어. 수미 씨는 네게 말할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그럴 수가 있니. 너를 아비 없이 자라게 한 것이 미안해서, 너의 존재도 몰랐던 것이 미안해서 하루는 커녕 한 시간도 못 기다리겠다 했지.
그래서 그날, 그리도 문득 아버지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고 나니 문득, 이상하게 느껴진다. 아버지는 왜, 왜 지금, 어머니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삶을 보낼 만큼 보낸 바로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일까.
그때, 아버지의 눈길이 창에서 나로 옮겨졌다.
그런데 아직도 사과를 못 했더구나.
.......
미안하다.
미안하다, 헌수야. 그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오래되어 빛바랜 종이처럼 버석거린다. 마르고 주름 없는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이 이질적이다. 노인의 표정은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읽을 수 없게 기묘하다. 나를 향해 어깨를 벌린 아버지의 등 뒤로 아버지의 눈주름만큼이나 낡은 햇볕이 부서져 들이친다.
아버지, 제 이름 말이에요.
그래 헌수야, 네 이름, 장헌수.
...... 아버지랑 어머니 이름 한 글자씩 딴 거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헌석, 수미.
아버지가 어린아이처럼 입을 헤 벌리고 함빡 웃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 그럼.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버지가 저 멀리 아득히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