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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크너 Nov 24. 2023

[홍대 북클럽 사람들] 02. 읽느냐 사느냐

독서모임에 모여든 도시 직장인들의 날것 그대로 이야기

02. 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모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둘째 주 한 명의 회원이 들어와 5명으로 늘었다. 리더는 첫 책 『남아 있는 나날』에 이어 다음 책으로 데이비드 그로스만의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를 추천했다. 작가도 책도 처음 들어보는 이스라엘 작가의 블랙 코미디다. 책에 대한 리더의 해박한 식견이 느껴졌다.


“리더님은 어쩜 이런 명저들을 알고 추천하시나요? 대단합니다.”

“하하,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부커상을 받은 작품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남아 있는 나날』도 그렇고, 오늘 이 책도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죠.”


처음 두 권만 리더가 추천하고, 이제부터는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한 권씩 정하기로 했다. 무슨 책을 선정할까 고민 끝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추천했다. 예전에 읽은 책이었지만 이번 참에 다시 읽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이 정도 유명한 고전이면 다른 회원들에게 욕먹지 않을 것 같았다. 다들 나처럼 서로를 의식했는지 첫 라인업은 『이방인』과 함께 『달과 6펜스』, 『햄릿』 등 ‘누구나 칭송하지만, 누구나 읽지 않는’ 고전들이 정해졌다.


“어휴, 결국 이렇게 되네요.”

셋째 주 토요일, 모임 시작을 10여 분 앞두고 둘만 있는 자리에서 리더가 미소를 띠며 푸념했다

“저는 장돌뱅이처럼 여기저기 독서모임을 많이 했거든요. 모임 초창기에는 늘 『이방인』, 『달과 6펜스』 같은 기본서(?)를 읽고 토론해야죠.”


리더의 푸념도 미소도 모두 이해됐다. 회원마다 독서 경험이 다르기에 누군가는 이미 읽은 책들이 더러 등장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다. 그냥 다시 읽으면 된다. 독서는 몰랐던 정보와 재미를 얻는 것 이상으로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 더 새롭고 묵직한 의미가 발생한다고 믿는다. 『이방인』,의 줄거리를 훤히 안다고 하더라도 다시 읽고 남들과 토론하면 다른 게 보이는 법이다.


from Pixabay


시간이 갈수록 회원 수도 늘어났다. 나와 동갑내기 치과의사 홍영호는 첫날부터 우리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는 3년 전 결혼했고, 집은 중랑구 상봉동이었다.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 토요일 이 황금시간에, 서울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오는 게 의아했다. 그는 “올려주신 소개 글과 책 리스트가 마음에 들었어요. 마침 와이프도 취미 생활이니 존중해 주겠다고 하네요.”라며 호쾌하게 얘기했다.


직업이 의사여서인가 홍영호는 집요했다. 『이방인』, 『달과 6펜스』를 처음 읽는 그는 사소한 궁금증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묻고 또 물었다. 자기 생각과 다른 의견은 곧장 반문했고, 납득할 때까지 쉼 없이 상대방을 몰아쳤다. 그런 탐구정신이 부담스럽지만 반가웠다. 저런 학구열이야말로 독서모임을 건전하게 하는 원동력이리라.


홍영호와의 세 번째 모임의 선정도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한 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고전 중 고전이지만, 원전을 음미하며 읽는 이는 드물었다. 모임을 하루 앞둔 금요일, 각자 발제문을 올리는 단톡방에 홍영호가 메시지를 올렸다.


“저는 이 책이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읽지 못하겠습니다. 이번 주는 쉬겠습니다.”


홍영호의 말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이 아프거나 생업에 지장이 생긴 것도 아니고 책이 어려워서 쉬겠다니, 무책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햄릿』의 숨은 의미를 찾아내느라 많이 고민했고, 좌절한 나머지 불참을 선택했을 테다. 그런 진지한 태도는 존중하지만, 『햄릿』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다. 하루 전 어렵다는 이유로 쉰다는 건 다른 회원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네, 영호님, 잘 알겠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한참 후 리더만이 짧게 대답했다. 이튿날 나머지 회원들은 『햄릿』을 두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쓱 넘어가고, 아는 부분이 나오면 열심히 떠들었다.


그다음 모임에도 홍영호가 보이지 않는다. 리더는 조심스럽게 회원들에게 얘기했다.

“에… 그게… 어제 홍영호님에게서 장문의 카톡이 왔습니다. 『햄릿』과 이번 주 『인간실격』을 읽으며 책이 이렇게 어려울 수 있음을 처음 느꼈고, 수치심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이대로는 정상적으로 토론할 자격도 없고, 여러분을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조금 더 수련하고, 스스로 떳떳해질 때 모임에 오겠다며 아쉽지만 우리 모임은 그만두겠다고 말했습니다.”


아! 『햄릿』을 읽으며 ‘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고민했을 홍영호의 순수한 열정이 떠올랐다. 그 완벽주의적 성향이 부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넘어가고, 다른 회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될 것을 우리의 햄릿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이때 원미정이 불쑥 어깃장을 놓았다. “유난 떠네. 나와서 몇 마디 떠들면 될걸.”


교토 금각사 전경 (from Pixabay)


아홉번째 모임의 책으로 나는 『금각사』라는 일본 소설을 선정했다. 몇 년전 한 유명 소설가가 표절해 유명세를 탄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이다. 회사 선배 김병덕 형의 추천으로 사놓고 묵혀둔 책으로, 이번에 읽으면 되겠다 싶었다.


책을 펼쳐들고 천천히 읽어갔다. 큰일났다. 너무 어렵다. 작가는 대체 뭘 말하려는 것인가. 소설은 실제 일본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을 소재로 한다. 하야시 쇼켄이라는 실존 인물이 1950년 7월, 교토의 유명한 불상인 금각 안으로 들어가 불을 질렀다. 그는 뒷산으로 올라가 금각이 불타는 장면을 바라보며 단도로 자신의 몸을 찔렀다. 혼수상태에서 체포된 뒤 범행의 이유로 '미에 대한 질투'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말에서 힌트를 얻어 소설로 옮겼다.


교토의 금각은 그 지역에서 예로부터 궁극의 미, 도달할 수 없는 관능을 상징한다. 어려서부터 금각 옆에 살면서 그 신화를 몸으로 머금어온 소설의 주인공 미조구치에게는 금각은 ‘최고의 선’이었다. 그는 대학교에서 안짱다리 장애를 가진 친구 가시와기를 만난다. 가시와기는 자신의 핸디캡을 오히려 자기 몸에 아름다운 것이란 단 하나도 없는 특수성을 상징한다며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인다. 미조구치는 가시와기를 보며 말더듬이란 자신의 단점을 금각의 미를 품은 자아로써 상쇄한다. 이 세상 어떤 것도 금각보다 아름다울 수 없고, 나는 그걸 받아들인 사람이다! 금각에 몰입한 나머지 이성과 몸을 섞으려는 순간에도 금각의 환영이 나타나 덧없는 허무감을 주며 쾌락을 방해한다.


줄거리를 쉽게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책은 어려웠다. 나는 주인공 미조구치의 일생 전 과정에 개입한 금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도 아닌 건물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한 인간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평생 구속당할 '꺼리'가 된단 말인가. 밑줄을 긋고 여러 번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어려운 내용에 번역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을 질렀다'고 쓰면 될 것을 왜 '점화하였다'고 표현했을까.


“책이 너무 어려워서 읽기 녹록지 않네요.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단톡방에 글을 올려 다른 회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저도 너무 어려워서 진도가 안 나갑니다.”

“저도요.”

기다렸다는 듯 다들 울상을 토로한다. 책을 추천한 장본인으로서 괜히 찔렸다.


며칠 후 독서모임을 이틀 앞둔 목요일, 리더에게서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 태설님. 추천해 주신 『금각사』는 너무 어려워서 지금 책을 못 읽고 오신다는 회원들이 늘었네요. 저도 꾸역꾸역 다 읽긴 했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서요. 혹시 태설님께서도 이해해 주시면 이 책은 과감히 생략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그렇게 초유의 ‘책이 어려워 모임을 중단한 사례’가 발생했다. 우리는 그 모임을 쉬고, 다음 주 다른 책으로 모였다. 회원들 사이에서 『금각사』를 재낀 건 성급한 게 아니었나 반성이 기류가 밀려왔다. 할 말이 없어 침묵으로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지언정 일단 모여 아는 대로 떠드는 게 맞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어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고한 책을 배제하면 누가 책임감을 갖고 책을 선정하고, 모임 운영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인가. 이날의 반성을 바탕으로 이후 150권을 더 읽는 동안 한 번도 정해진 책을 제외한 일은 없었다.


얼마 후 내게 『금각사』를 추천한 병덕 형을 만나 이 책이 뭐가 그리 재미있었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는 나의 투정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미조구치의 트라우마가 이해되지 않나요? 금각에 자신을 묶은 처절한 자기 규제가 느껴지지 않나요?”


병덕 형의 횡뎅그렁한 표정을 보며 순간 홍영호가 떠올랐다. 『햄릿』을 바라보는 홍영호의 낭패감이 이런 것인가. 세상 사람들 모두 『햄릿』을 예찬할 때 그렇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심정이 이런 것이었는가. 그대는 잘못이 없다. 그대만 무책임한 게 아니다. 『햄릿』과 『금각사』 앞에서 좌절한 우리는 모두 잘못한 것 없는 보편적 독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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