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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Oct 01. 2024

나는 통장에 돈이 꽂힐 때가 제일 무섭다

임포스터 신드롬, 다들 겪어보셨나요?

내 인생은 어찌어찌 굴러왔다. 정신병 때문에 몇 년 동안 방구석에서 천장만 보고 살다가 덜컥 인권일을 했다. 그러다 어찌어찌 호주로 대학을 가서 학사 학위를 땄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인권일을 하다 현재는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를 하는 짬짬마다 상사가 시킨 일을 하고, 어쩌다가 일이 들어오면 부업을 한다. 부업은 주로 인권 관련 콘텐츠를 번역하거나 과거에는 영어로 메일을 쓰기도 하는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일을 맡았다. 그 외에도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중 어쩌다 섞인 번역 업이 조류가 되어 해일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주변인들은 내가 번역을 잘하는 줄 알고 있었다. 망했다.


최근에 어떤 번역 업무를 할 일이 있었다. 어쩌다가 알게 된 친구가 너 이거 해보지 않을래?라고 하며 던져준 A4 두 장짜리의 한영번역이었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어 다 까먹었는데, (까먹을 만한 영어 실력이 있지도 않았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쨌든 일은 들어오고 나는 무엇인가는 보여줘야 했다. 일단 1차로 얼기설기 쓴 걸 영어를 잘하는 다른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유려하게 다듬어주었다. 그리고 그걸 제출했다. 


번역은 보통 초벌번역을 기준으로 단어수로 돈을 받는다. 내가 받을 돈은 5만 원 남짓이었다. 거짓말 안 하고 내가 결과물을 보낸 날부터 돈이 들어오고 나서도 일주일을 제대로 자질 못했다. 그깟 5만 원 때문에, 번역의 품질이 거지 같다고 말하면 어쩌지, 내가 번역을 실수했으면 어쩌지, 기타 등등... 결국 그 글은 무리 없이 지나갔지만 나는 다시는 번역일을 할 자신이 없다. 영한이라면 차라리 할 만한데 한영은 정말 자신이 없다. 일자리를 찾고 있는 지금도 내가 영어를 아주 잘한다는 가정하에 헤드헌터들의 메일이 날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히려 벼랑에 몰린 기분이 든다.


나는 일을 할 때면(특히 번역 업무) 내가 남들을 속이고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에서 10까지가 업무 능력도라면, 나는 3 정도 되는 사람인데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8 정도는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임포스터 신드롬을 일을 할 때마다 겪는다. 나의 상사는 나의 한계를 알고 배려해 주지만 다른 클라이언트의 경우, 이번 일만 해도 번역이 잘못되면 오로지 내가 뒤집어쓰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주변에서 넌 유학도 다녀오고 영어도 잘하잖아라고 말할 때마다 저 밑의 해구에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임포스터 신드롬은 자신의 일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적든 많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도대체 이런 종류의 짐을 어떻게든 다루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오로지 자신 있다고 말할 만큼 시간을 축적해 온 건 오로지 한국어 글쓰기뿐인데, 내가 현실적으로 살아오면서 입에 풀칠을 해온 일들은 내가 두려워하는 일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딛고 살아가는 거겠지. 업이 주는 무게를 버티면서.


난 영어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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