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
2012.7.26 (목)
우연히 알베르게에서 만난 B 군과 스페인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는 언니 J를 만나 우린 셋이서 뭉쳐서 다니고 있다. B는 가지고 온 자전거를 타고 숙소까지 가고 나와 언니는 걸어서 작은 마을인 주비리까지 왔다. 어느새 두 번째 날이라니. 새벽에 일어나본적도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새벽공기를 마시며 해가 뜨는 스페인 풍경을 바라보는 건 나에게 엄청난 영광 같은 순간이었다.
어제 피레네 산맥을 우선 넘은 탓에 이틀째인 오늘은 수월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만만치 않은 순례길인건 확실했다. 벌써 물집하나가 나기 시작하고 발톱은 조만간 빠질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다. 언니의 J는 스페인어도 조금 할 줄 알아서 나에게 스페인어로 음식을 주문하는 법도 알려주었고 나름의 꿀팁도 전수해 주었다. 특히 스페인에서 '바'의 개념은 온전한 술집이 아닌 카페와 음식점을 합친 개념이라 간단하고 싸게 먹기 좋은 보까디요 (스페인식 샌드위치)를 추천해 주었다. 앞으로 보까디요만 맨날 먹을 예정이다.
주비리에 도착하자마자 공립알베르게에서 쉬고 있을 때 다른 한국인 순례자들도 만났는데 다들 자전거를 타고 오셨고 나이대도 있어 보이셔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우리 세명을 응원해 주셨다. 어른들이라 우린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는데 옆에 있는 외국인들이 우릴 모두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마치.. 신선한 컬처쇼크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고개를 숙이고 어른에게 인사하는 문화는 보기 힘들긴 하지 암요.
알베르게에는 공용 주방이 있어 우린 쌀과 참치를 샀고 일행 중 한 명이 김과 고추장이 있어 와구와구 밥을 비벼먹었다. 살짝 싱겁고 밥은 설익었지만 배부르면 됐다. 뭔가 함께 하니까 모든 게 즐겁고 행복하다. 나 혼자 배낭 메고 외롭게 걸을 줄 알았는데 역시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삶이 좋은 것 같다.
내일은 빰쁠로나 드디어 큰 도시로 가게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 조금씩 까미노를 즐기는 것 같다.
2012. 7. 27 (금)
빰쁠로나를 향하는 발걸음은 나름 가벼웠다. 작은 시골이 아닌 드디어 도시로 진입한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걷는 동안 마주친 수많은 표지판들은 더더욱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어느 지점에서 황금빛 들판을 보게 되었다. 올해 초에 네덜란드에서 반고흐 박물관에서 봤던 어느 작품이 순간 떠올랐다. 한참 동안 바라봤던 작품은 노란색도 아닌 황금색 들판에 한 농부가 자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당시엔 그 작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반고흐라고 어떻게 금색으로 표현할 수가 있어 싶었는데 아니었다.
존재했다 황금 들판은..
나에게 그 순간 까미노는 판타지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곳으로 돌변했다. 한순간 다큐멘터리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변하는 순간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내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감사한 순간이었고 한참 동안 그 들판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빰쁠로나에 진입하면서 점점 사람 사는 냄새, 시끌시끌한 풍경이 반겨주는 듯했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왔지만 이제야 제대로 된 스페인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특히 나는 그 순간 순례자가 아닌 관광객이 된 것 같았고 조금만 걸어도 레스토랑과 바도 많아 보여 유흥에는 딱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빰쁠로나 공립알베르게에 짐을 푸고 나와 로컬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저녁엔 미트볼 볼로네즈 파스타를 해 먹었다. 세 명이서 어찌어찌 한 요리긴 하지만 이렇게 맛있다니... 너무 감동이었다.
이런 도시에 왔는데 우린 핀초바를 놓칠 수 없었다. 핀초는 꼬챙이에 꽂혀있는 작은 안주이자 요리였는데 한국의 꼬치와 비슷한 느낌이다. 가격도 너무 착해서 핀초 하나에 1-2유로 정도밖에 하지 않았고 종류도 많아서 원하는 핀초를 골라서 맥주와 먹기 딱이었다.
이렇게 잘 먹고 다녀서 아무리 걸어도 살이 안 빠질 것 같다. 망했다.
독일에 돌아가서 다이어트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