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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젖을 물린 할머니 이야기

푸른 방의 나온 그녀, 나의 이야기

by 할수 최정희

제3장 1

마른 젖을 물린 할머니 이야기

추방과 그 기억

나는 태어난 이후 세 살 아래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날까지 엄마·아버지의 방에서 살았다. 첫째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때 나는 이미 안방에 있었다. 작은 방에서 산고를 겪는 엄마의 신음이 간간이 들려왔다.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아기를 씻을 물을 가마솥에 물을 데우라고 했다. 아버지가 부엌에서 가마솥에 물을 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모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는 혼자서 이런 생소한 일을 겪고 있었다. 엄마에게 힘을 주라는 할머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으앙~”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추다.” 할머니가 들뜬 소리로 외쳤다. 아버지가 작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이날, 나는 작은 방에서 할머니의 세계, 안방으로 이주하였다. 나는 이날 밤엔 울지 않았던 것 같다. 생전 처음 겪는 일에 놀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첫 번째 남동생이 태어난 날 때 겪은 일인지 둘째 남동생이 태어난 날 때 있었던 일인지 점점 더 알 수 없다.

이 기억이 첫째 동생이 태어난 날 것인지 둘째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추다!'라는 그 외침이 울려 퍼질 때마다 나는 점점 더 작은 방에 갇혔으니까. 방금 작은 방에 갇혔다는 문장을 쓰는데, 예전에 자주 꾸던 한 꿈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런 꿈을 반복적으로 꾸는지 여러 해 동안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이제 그 의문이 풀렸다. 이 꿈 이야기는 할머니 이야기 분석에서 말하려고 한다.


안방에는 천장 가까이 여닫이문의 벽장이 있었고, 양쪽 벽에 박힌 네모난 횟대 위에 반다지 두 개와 작은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반다지 아래는 늘 비어있었다. 겨울이면 횟대에 메주를 달아놓았다. 메주가 마를 때까지는 햇볕이 잘 드는 처마 아래에 달아놓았는데. 가끔은 메주가 발효되는 냄새가 났다. 나는 숨쉬기가 힘들었는데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봄이면 윗목에 대나무 단을 엮고 그 위에 넓은 판을 층층이 올려 누에를 길렀다. 엄마가 뽕잎을 올려주면 누에들은 고개를 들었다 숙이며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잎을 갉아먹었다. 가끔 바닥으로 떨어진 누에는 내가 살며시 손으로 집어 올려주었다. 엄마가 준 뽕잎은 금세 사라지만, 누에는 통통하게 자랐다.


그러다 어느 날 누에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잠자는 거라고 했다. 며칠 후, 누에들은 다시 깨어나 전보다 더 세차게 뽕잎을 먹었다. 사각사각 소리는 온방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누에들이 입으로 실을 뽑아내어 자기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누에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대신 고치는 점점 더 새하얗게 되어갔다.

겨울이면 할머니는 화롯불을 피워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벽에 걸린 커다란 십자수 천에는 ‘SWEET HOME’이라는 글씨와 함께 마주 보는 새와 꽃들이 수 놓여 있었지만, 달콤하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

엄마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밥상은 따로 차렸고, 엄마와 동생들과 나는 둥그런 상에 둘러앉았다. 나는 이 모습이 엄마가 낮은 신분임을 확인시키는 '의식' 그 자체라고 느꼈다. 우리 또한 엄마와 같은 상에 앉음으로써 그 신분을 물려받았다. 그토록 귀한 장손(첫째 남동생)조차 이때는 예외가 아니었다. 이 밥상의 질서는 '남아선호' 이전에, 할머니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어른'의 권력이 지배하는, 더 복잡하고 견고한 성(城)이었다."

엄마는 늘 가장 맛있고 가장 큰 생선 토막을 할머니와 아버지의 밥상에 올렸다. 두 사람뿐인 밥상에 고기도 더 많이 올렸다. 나와 동생들의 눈길은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나는 고기와 생선을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할머니와 아버지는 다 못 먹는다며 생선과 고기를 미리 넘겨주기도 하고 때론 대부분 먹지 않고 남겼다. 그러면 동생들은 얼른 먹었다.


내 첫 세상은 기억나지 않은 작은 방 세상과 기억하는 안방 세상, 이렇게 두 개다. 내 생애에 대한 글을 쓰면서 “기억나지 않은 나의 첫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라는 질문이 생겨났다. 이 질문의 꼬리를 따라 나는 그 시절 그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나는 태어나서 삼 년간 살던 작은 방 세상의 단서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기억하는 세상에서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내게 그 단서를 제공해 줄 사람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마른 젖 – 체념의 첫 학습

어린 나는 안방에서 엄마 품으로 돌아가려고 울었다. 이때 할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물렸다. 할머니의 젖을 빨아먹던 기억이 없다. 그래서 상상해 본다. 할머니의 젖은 입술에 닿는 촉감도 냄새도 엄마의 젖과 달랐을 것이다. 엄마의 젖 냄새가 나는 탄탄하고도 부드러운 살결과는 달리, 할머니의 젖무덤은 젖 냄새도 나지 않고 아래로 늘어져 있었고 쭈글쭈글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젖을 빠는 행위 자체는 위안의 제스처일 뿐, 허기와 결핍을 채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울음을 멈춘 이유는 욕구가 채워져서가 아니었다. 엄마에게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체념이 먼저였고, 체념, 해봤자 안 된다는 앎이 울음을 누그러뜨렸을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울음 멈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보살핌이 효과가 있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 기쁨은 오해였다—내가 멈춘 것은 만족이 아니라 포기였으니까.

이 일은 첫 체념 학습이었다. 엄마가 그립고 엄마에게 가고 싶었지만, 나는 할머니의 방에서 살아야 했다. 울음을 멈추는 대신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 체념은 곧 생활의 여러 장면으로 스며들었다. 앞서 말한 친구들을 우리 집에 데려왔을 때, 다른 집 마당에서 왁자지껄 놀던 친구들이 아버지가 키우던 꽃밭을 둘러보고 선인장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친구네 집엔 꽃밭이 없었다. 선인장을 키우는 집도 없었다. 이 낯선 장면을 바라보느라 입을 다물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아이들이 내게 준 그 정적이 내 안에 불편함으로 남았을 뿐. 이후 나는 다시는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을 겪느니, 애초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도 육이오 때 전사한 아들 생각에 늘 가슴 한쪽이 비어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젖을 물리며 그 비어 있던 자리를 메우려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의 품을 잃은 대신 할머니의 품으로 옮겨갔고, 할머니는 잃은 아들의 빈자리를 손녀로 채웠다. 할머니와 나는 서로의 채울 수 없는 결핍을 껴안은 채 삶을 버텨냈다.

내가 엄마에게 가려면 여러 고난을 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험하고 두려워서, 결국 덜 아픈 길을 택했다. 그것이 할머니의 품이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에서 주인으로서 오는 기쁨을 얻으려면 여러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나는 그 불편함이 싫어 기쁨을 포기하고, 이미 학습된 편안함을 쫓았다.

나는 늘 손님으로 살았다. 손님은 주인이 아니기에 책임이 적어 자유롭지만, 동시에 진정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편안함을 얻는 대신 관계에서의 주도권, 내 집 내 공간이라는 안정감, 혹은 갈등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용기 같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엄마도 내가 첫아기라 나를 품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아기를 안고 있을 때 정말 아기 살결의 촉감과 아기 냄새와 따뜻함이 너무나 좋았다. 잠시 내려놓으면 아기의 냄새로 내 몸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사라진다. 이 순간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잠시도 내려놓고 싶지 않았고 온종일 안고 있고 싶었다. 엄마만이 느낄 수 있는 이 감정과 느낌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엄마도 나와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도 나를 품고 있고 싶었을 것이다.

세 살짜리 나도 엄마의 품이 포근하고 따뜻할 것이고 엄마의 젖 냄새나는 품이 세상 어느 곳보다 좋을 것이다. 아마도 천국이 있다면 아기에겐 엄마 품일 것이다. 내가 엄마를 찾아 우는 소리를 들은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집에서 우물물을 길어 음식을 장만하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과 반찬을 만들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기저귀와 가족의 빨래를 하려면 인근 저수지에 가서, 손으로 빨래를 해야 했다. 겨울이면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꽁꽁 언 얼음을 깨고, 시뻘겋게 언 손으로 방망이를 들고 빨래를 두드려야 했으니 엄마의 삶은 고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리기까지 했다. 본능이 주는 자식을 안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할머니에게 나를 보내는 현실적인 선택을 한 엄마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이제는 헤아릴 수 있다.

이 글쓰기는 분리된 두 세상을 잇는 다리다. 기억하는 세상의 고통과 슬픔이 결국 나를 살게 한 온기임을 밝혀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나지 않는 세상 그 빈 곳을 온기로 채우려고 한다. 내 세상을 따뜻하게 데우는 일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내 세상을 새롭게 지어나가는 일이기에.

영혼결혼식 – 상실의 의례

우리 집에서 굿을 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일로 삼촌의 영혼결혼식이었다. 삼촌은 육이오 때 금화지구에서 전사했다. 나는 할머니가 삼촌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듣지는 못했다. 삼촌의 쥐꼬리 보상금이 나올 때마다 입을 꾹 다물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평소엔 마루에 앉아 담뱃대를 물고 담배를 피웠다. 이때 할머니의 눈길은 어디에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삼촌을 생각하였을 것 같다.


우리 집에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난 기억이 없다. 그런데 할머니와 엄마가 점을 보러 갔다. 무속인이 삼촌이 돌아가신 것을 알아맞혔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죽었기 때문에 결혼을 시켜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삼촌의 영혼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굿을 하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모여들었다. 무당이 할머니에게 죽은 처녀의 사주를 하나 구했다고 무속인은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앉아 볏짚으로 인형 두 개를 만들었다. 나는 무당이 인형을 만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무당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인형을 만드는 것이 내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무당이 짚 인형 하나를 할머니에게 주었다. 무당은 남은 짚 인형을 들었다. 할머니가 든 인형은 죽은 삼촌을, 무당이 든 인형은 죽은 처녀를 상징했다. 무당은 자가기 가진 인형을 들고 할머니가 가진 인형 가까이 다가갔다가 떨어지기도 하면서 삼촌처럼 말을 했다. 이번엔 처녀처럼 말하다가 점점 말을 빨리 뱉어내다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당은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풀 쩍 풀 쩍 뛰기도 했다. 큰 소리로 울기도 하다가 웃기도 하고 속삭이기도 했다. 다음엔 무당이 대나무를 들고 흔들었다. 정말 신이 들린 듯 대나무가 흔들렸고, 무당은 자신이 섬기는 신이 되어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말 신이 내려왔다며 두려워하면서도 놀라워했다. 무당이 할머니에게 대나무를 건네주었다. 사람들이 “봐라, 봐라, 아들이 왔다”라고 속삭이기도 했다. 무당이 아버지에게 대나무를 주었다. 대나무가 몹시 떨렸다. 보통 사람들이 아무리 흔들려고 해도 그렇게 못할 만큼 격심하게 떨렸다.

할머니는 이 굿을 하고 난 다음 얼굴이 좀 펴졌다. 할머니는 여전히 긴 담뱃대를 물고 이 세상을 뜰 때까지 담배를 피웠다. 굿을 한 이후에도 우리 집에서 삼촌의 전사가 준 슬픔을 온전히 끊어내지는 못했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 바로 그 끊어내지 못한 증거다. 굿을 하면서 슬픔을 끊어낼 수만 있다면 몇 번인 들 못 하겠는가? 아이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모두 조용조용 논 이유가 이 굿 때문일까?

내 슬픔의 기원을 알고 나서 내가 느낀 것은 삼촌을 외롭게 하는 일이 할머니와 아버지를 외롭게 버려두는 일이고 나를 외롭게 버려두는 일이라는 것이다. 며칠 후 서울 국립묘지에 갈 예정이다. 그리고 해마다 현충일에 아버지 대신 내가 갈 것이다. 가족이 표현하지 못한 애도를 내가 하려고.

빼앗고 빼앗긴 관계 – 모녀의 38선

어느 날, 엄마가 텃밭에서 내게 말했다. “정희야, 헛간에 가서 호미 좀 갖다 줄래?” 엄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할머니가 “어린아이가 어째 하노?” 하며 잽싸게 헛간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호미를 내밀었다. 나는 닭 쫓다가 지붕을 쳐다보는 개가 되었다.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발끝으로 흙만 파고 있었다. 서운함을 삼키려고 목구멍에 힘을 주었다. 그때 나 들으라는 듯 엄마가 할머니에게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그러시면 애 버릇 나빠져요. 정희 심부름은 놔두세요." 그 말 한마디에 꺼졌던 마음에 다시 불씨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이후 나는 “정희야, 이것 좀 해줄래?”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못했다. 엄마의 심부름은 단순한 일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마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였고, 그 일을 해내면 엄마 마음 한 칸에 내가 들어앉고 그러면 내 몸이 따뜻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는 기차가 멀어져 가듯 빨리 내게서 멀어져 갔다.

언젠가 엄마가 말했다. 그날 이후 내게 사소한 일도 못 시켰다고. 내게 시키는 일이 시어머니께 시키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도 사소한 일을 서로 하면서 관계를 형성해 가야 하는데, 나는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얼라가 우째 하노. 시키지 마라.”라고 말만 하는 것과 “얼라가 우째 하노.” 하곤 할머니가 직접 해버리는 것의 차이는 아주 명백하다. “얼라가 우째 하노? 시키지 마라.” 말만 했을 때는 엄마가 내게 심부름을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나이예요.”라며.


할머니는 말과 동시에 내 경험을 가로채 버렸다. 그 결과, 엄마와 내가 연결될 통로가 막혔다. 세상은 할머니처럼 무조건 퍼주지 않기에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때로 상대를 설득해야 하고 때론 자기주장을 펼쳐야 한다. 나는 할머니가 주는 것만 받아먹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세상과 관계 맺는 법, 자기주장을 펼치는 줄도 상대를 설득할 줄도 잘 모른다.

할머니는 나를 독차지하고 싶어 엄마가 내게 시킨 심부름을 가로챘다. 그날, 우리 모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평생 넘을 수 없는 38선처럼 선명한 경계였다. 대신 할머니에게는, 육이오에서 전사한 아들을 대신할 전리품, 딸 하나가 생겼다.

새로운 모임에 참석하면 나는 종종 겉돈다. 낯선 얼굴이 익숙해져 가면서 차츰 마음이 열리는 나와 달리 사람들은 만나자마자 금세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나는 그들이 마음 문을 여는 속도에 놀라 감탄하면서 한편으로는 약간의 소외감을 느낀다.

나는 아직도 텃밭에서 엄마가 심부름을 시켜주길 기다리는 걸까? 친구들에게 놀러 가고 싶은데 혼자 가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때 나는 할머니에게 놀러 데려다 달라고 졸랐다.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친구들이 놀고 있는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이때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정희 잘 데리고 놀아.”라고. 지금도 나는 할머니가 나를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데려다주길 기대하는 걸까? 난 왜 아직도 닭 쫓다가 지붕만 쳐다보는 어린 강아지로 살아가고 있을까?


몸의 기억 – 사랑과 억압의 혼합

할머니는 외출할 때면 늘 나를 등에 업고 나갔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나를 업고 돌아왔다. 그날도 역시 할머니가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이를 보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다 큰 애를 업고 다니면 허리 아픕니다. 이젠 업고 다니지 마세요.” 그리곤 나에겐 “할머니에게 업혀 다니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며칠 후 나는 또 할머니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기분 좋게 몸을 좌우로 흔들며 덩실덩실 걸었다. 할머니의 손과 팔, 등에 전해지는 흔들림과 체온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나는 이 감각이 좋았다.

근데 며칠 전 엄마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 등에 업히지 마라던 엄마의 말에 따라 나는 할머니에게 내리겠다. 할머니의 등에서 마음대로 내릴 수 없었다. 할머니는 양다리를 꽉 잡고는 더 덩실대며 걸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다리를 버둥댔다. 내가 버둥댈수록 할머니는 내 다리를 세게 잡고 더 덩실거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나를 놓아주지 않고 더 꽉 껴안는 할머니의 팔에서, 나를 절대 잃지 않겠다는 강한 욕망이 느껴졌다. 그것은 내 의지를 꺾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사랑의 확인이기도 했다.

내가 아들을 업고 다니면서 할머니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내려달라는 나를 왜 내려주지 않고 더 덩실 춤을 추며 걸은 이유를, 그건 내가 너무나 좋아서란 걸. 그때 내가 할머니의 이 마음을 그대로 알아챘다는 것을.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딸이 된 손녀까지 잃게 될까 봐서라기보다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꽉 다잡았다는 것을.


버려짐의 공포 – ‘죽음’의 첫 얼굴

한 번은 할머니가 외출하려고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할머니는 나를 데려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할머니를 따라가겠다고 하니, 오늘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 치마를 잡고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할머니가 집을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할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면 안 된다고. 엄마가 종아리를 때렸다. 나는 팔짝팔짝 뛰면서 앙앙 울었다. 바로 어제까지도 나를 업고 다니면서 좋아하던 할머니가 왜 나를 데리고 가지 않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할머니가 나를 버리고 영영 어디로 가버리는 것 같았고 외딴섬에 홀로 떨어진 것 같았다. 며칠 후에야 할머니가 문상을 가느라 나를 데려갈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섯 살 아이에게 '죽음'이라는 낯선 단어는, 세상의 전부였던 할머니가 나를 버리고 떠나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마른 젖, 나를 놓아주지 않던 등, 나를 두고 떠나던 한복 치마. 이 기억들은 모두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쪽 면에는 더없이 따뜻한 사랑이 새겨져 있지만, 그 뒷면에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시리고 깊은 그늘이 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제각기 달라 보여도, 내 삶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그늘이 섞여 있는 점은 같다. 사랑과 그늘이 섞인 비율에 따라 삶이 좀 가볍기도 하고 더 무겁기도 하지만. 사람은 결국 자기를 알아내고 나서야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쫓겨나는 둘째 남동생

여섯 살쯤 있었던 일이다. 바깥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할머니가 성냥개비에 불을 붙여 호롱불을 켰다. 바람에 작은 불꽃이 검은 연기를 내며 일렁거렸다. 안방 벽엔 할머니와 나 그리고 첫째 남동생의 검은 그림자가 그 불꽃을 따라 일렁거렸다.

“엄마, 엄마.” 어두컴컴한 작은 방에 첫돌이 지난 남동생의 목소리가 새어들었다. 나는 남동생이 혼자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남동생이 문을 밀치고 안방으로 어기적어기적 건너왔다. 할머니의 눈길도 나도 남동생을 따라갔다. 둘째 남동생은 기다 섰다 하며 안방에 달린 부엌문을 향해 갔다. 부엌문을 열고 “엄마.”하고 불렀다.

저녁 설거지를 하던 엄마는 “설거지를 빨리 끝내고 갈 게.”하고 했다. 남동생은 엄마는 “설거지 빨리하고 들어갈 게.”라고 말했다. “엄마, 엄마” 남동생이 울먹이며 엄마를 자꾸 불렀다. 할머니는 시끄럽다며 둘째 남동생에게 작은 방으로 가라고 했다. 작은 방에 가면 저 동생은 무서울 텐데. 그러나 할머니의 말에는 여지가 없었다.

작은 남동생이 작은 방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둘째 남동생은 내게 없는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나보다 신분이 더 낮았던 것이다. 장손이 아닌 그 작은 아기는 할머니의 말 한마디에 울지도 못하고 작은 방으로 건너갔다. 당시 가부장적 가족 질서에서 장손만이 권력을 부여받았고, 다른 자식들은 늘 주변으로 밀려났다. 우리 집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작은 방문을 여는 남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내 가슴에 밀물처럼 슬픔이 밀려왔다. 작은 남동생을 무서운 어둠 속으로 쫓아내는 할머니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저 동생처럼 어두운 방으로 쫓겨나지는 않는구나’라는 생각도 머릿속에 스쳤다.

이미 손녀와 장손을 돌보고 있던 늙은 할머니에겐 또 다른 아기는 그저 힘에 겨웠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나는 할머니가 사람을 차별한다는 생각이 들어 할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 할머니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내가 작은 남동생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 사유가 될까?


컴컴한 작은 방에서 홀로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을 남동생, 드디어 엄마가 방에 왔을 때 안도감으로 그 불안과 두려움이 사르르 녹아내렸을 것이다. 작은 남동생은 이 일을 기억할 수 없지만,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던 어두컴컴한 작은 방은 남동생의 무의식에 붉은 방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남동생에겐 엄마가 있다. 엄마는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자였다. 내게는 할머니는 있어도 엄마가 없다. 나와는 달리 엄마가 진짜 엄마인 남동생이 부럽다. 엄마가 내게 엄마가 아닌 이유는 제5장 엄마 이야기에서 하려고 한다.


전처의 제삿날

어느 날 할머니가 툇마루에 서서 엄마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번 제사에는 조금만 해라.” 할머니는 이 말을 마치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집 밖으로 휭 나가버렸다. 할머니는 외출할 때마다 나를 데리고 나갔는데,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엄마가 혼잣말을 말했다. “어무이는 이 제사만 되면 화를 내신다.”


엄마의 말들 듣는 순간, 작년에도 할머니는 엄마에게 “이번 제사는 조금만 해라.”라고 후딱 집 밖으로 나가버리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할머니가 왜 이 제사만 되면, 심기가 불편해지고 ’ 조금만 해라‘는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시집와서야 할아버지에게 자녀를 낳지도 못한 채 아파서 죽은 전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할머니가 왜 그 제사만 되면 퉁명스럽게 딱 한 마디 “이번 제사는 조금만 해라” 하고 집을 나갔는지가 이해가 되었다. 할머니는 이 말은 할머니가 심술궂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가부장적 제도의 억압 아래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의 억압된 분노의 표출이었다.

할머니의 부모들은 할아버지가 재혼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 친정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할머니 친정이 혹시 살기가 어려웠나? 그래서 할머니를 재혼인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보냈나? 할머니 친정이 가난했던 잘살았던 할머니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사람과 사람이 결혼하기보다 집안과 집안이 사돈을 맺는 형식이라 부모가 맘대로 결혼을 시켰으니까. 그래서 결혼하는 날 서로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재혼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몰랐던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면 할머니가 선택한 결혼이 아니라, 부모님이 보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여성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결정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남성 또한 부모가 시키는 대로 결혼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남성이나 여성 모두 시대의 제물이었다. 할머니는 고작 며느리에게 “이번 제사는 조금만 해라.”라는 말로 한풀이를 하는 게 전부였다.

“이번 제사에는 조금만 해라.”라는 할머니의 말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휑하니, 밖으로 나가던 할머니의 뒷모습도. 이 말과 할머니의 뒷모습에는 가부장제와 시대의 관습으로 억압된 여성의 삶이 배어 있다.

나도 가부장제와 시대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 뒷모습에도 할머니의 모습이 어려있을 것이다. 나는 이 모습을 털어내고자 이 글을 쓴다. 나는 한을 풀기보다 그것을 끌어안고도 내 삶을 살아내고 싶다.

아랫것이-

우리 동네에는 문중의 소유 서당이 있었다. 서당 옆에 작은 집이 하나가 달려있었다. 한 부부가 이 집에 살았다. 이 부부는 서당을 관리하면서 문중 논밭을 소작하기도 했다. 이 할아버지는 우리 문중 사람들 집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와서 온갖 일을 했다. 고모의 전통혼례식에도 와서 분주하게 오가며 여러 잡일을 했다.

어느 순간 할머니가 기분이 나쁜 듯 혼잣말을 했다. “아랫것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이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란 걸 알아챘다. 할머니가 이 말을 서당 할아버지를 두고 한 말로 어떤 행동이 거슬린 모양이었다. 이 할아버지의 일 중 하나는 마당에서 커다란 가마솥에 쇠고기로 국을 끓이는 일이었다. 이 할아버지가 끓인 국은 맛이 아주 좋다고 했다.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많은 양의 국을 끓인 경험이 쌓여서라 했다.


할머니의 “아랫것이” 이 말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신분 서열이 높은 자가 신분이 낮은 비천한 자를 비난하는 어투였다. 신분 서열을 겉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할머니 속에는 조선 시대의 신분제인 양반과 상놈이 존재했다. 할머니의 이 말은 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쳤다. 왜 이 말이 내 가슴을 친 걸까? 이 할아버지가 첫째 남동생에게 밀려난 나 같아서였을까? 대여섯 살 때 무심결에 들은 말이 평생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이것 말고는 뭐가 있겠는가.

할머니의 종교

할머니는 절에 다녔다. 그래서 우리 집 종교는 불교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다. 엄마도 아버지도 절에 가지 않고 나도 동생들도 절에 가지 않는데 말이다. 할머니는 우리 집 종교의 대표였다. 아버지와 엄마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절에 갈 때면 머리를 곱게 빗어 쪽을 찌고 치마저고리를 갈아입었다. 버선과 새 고무신을 신고 갔다. 이때는 나도 따라갈 엄두를 못 내었다. 할머니가 치장하는 모습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내가 따라갈 엄두를 못 내게 했기 때문이다. 절에 갔다 온 할머니에겐 생기가 넘쳤다. 먼 산길을 걸어서 갔다 왔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없는 게 놀라웠다.

할머니는 정월 대보름날이면 정지(부엌) 시렁에 잡곡밥과 나물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조상신에게 가족이 무탈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게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이며 빌었다. 가족 중 누가 배탈이 나거나 좀 아플 때 할머니는 양밥을 했다. 부엌에서 박 바가지에 물을 담고 쌀 한 숟가락을 넣고 저었다. 그리곤 고개를 숙이고 두 손 모아 조상신께 빌었다. 마당에 나온 할머니는 아픈 사람에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크게 벌리라고 했다. 할머니는 식칼 끝을 입을 향하게 들고 바가지의 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식칼에 조금 부었다. 식칼을 따라 흘러내리던 물이 입안에 몇 방울 떨어진다. 할머니는 “됐다.” 하고는 집 입구 쪽으로 식칼을 던졌다. 칼끝이 바깥을 향할 때까지 계속 던졌다.

할머니에겐 조상신께 비는 순간만이 아니라 박 바가지를 챙기는 일, 그 박 바가지로 독의 물을 퍼담는 소리, 숟가락으로 쌀을 푸는 소리와 물을 젓는 소리, 식칼이 마당에 떨어지는 소리와 흙을 찍는 소리까지 ‘낫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만큼 할머니는 정성을 다해 이 양밥 의식을 집행했다.

나는 부엌문 바깥에서 할머니가 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양밥을 할 때도 마당에서 지켜보았다. 한 번은 나도 배가 아파 양밥을 받았다. 나는 내 입속을 향해 있는 칼이 떨어져 나를 찍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런 의식이 정말 가족을 평안하게 그리고 병을 낫게 해 준다는 것이 나는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이런 일을 할 때면 우리 집으로 어떤 신비한 힘들이 몰려왔다. 할머니가 일을 끝내고 나면 우리 집에 가득 차 있던 보이지 않던 신비한 힘이 서서히 물러갔다. 우리 집은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런 보이지 않는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영적인 존재가 나타날 때 엄습해 오는 바로 그 힘으로 개체가 아니라 안개처럼 공중에 퍼져있다. 이것이 안개와 달리 투명한데 내 눈에는 그것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고 물러가는 것이 보인다. 양밥을 하는 동안 그것이 내내 우리 집에 가득 차 있다가 끝나면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이 현상이 왜 내게 일어나는지 모른다. 지금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수도 없이 경험했다. 내가 이런 경험을 한때는 성인이 된 후 종교를 가졌을 때다. 모임 시작 기도를 할 때마다 이것이 서서히 몰려왔다. 그리고 끝나는 기도를 하는 중에 서서히 물러가는 것을 느낀다. 눈을 뜨고 보면 그것들은 사라지고 없다. 내겐 왜 이런 것들이 보이는 걸까?


누런 삼베 수의

할머니는 가끔 서랍장에서 누런 삼베 수의를 꺼냈다. 이 수의는 할머니 환갑 때 마련한 것이다. 수의를 장만해 놓고 이십 년 넘게 더 사신 할머니, 주기적으로 수의를 꺼내 좀이 쏠았는지 습기는 차지 않았는지 살폈다. 할머니는 바람을 쐬어 말린 수의를 서랍장에 개켜 넣었다.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수의를 놓고 다시 신문지로 덮었다. 좀이 수의를 쏠지 못하게 가루담배가 든 봉지를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할머니와 한방에서 살았기에 나는 이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나면서 누런 삼베가 더 누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꼭 할머니 같았다. 누런 삼베 수의만 봐도 죽음이 떠올라 무서웠다. 근데 할머니는 담담하게 수의를 매만졌다.

나도 할머니가 되니, 수의를 매만지던 할머니 마음을 짐작하겠다. 자신이 머지않아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담담하게 수의를 대할 수 있었다고. 지금 내 마음은 할머니 마음과 같다. 수의는 외출할 때 입을 옷과 다를 바 없다. 다른 게 있다면, 스스로 입을 수 없는 옷이라 다른 사람이 입혀준다는 것과 한 번 입으면 벗을 수 없다는 것만 다를 뿐.


할머니는 수의를 외출복으로 여겼을 것 같다. 저세상 길에 부처님을 만나, 감사를 전할 때, 필요한 정중한 옷으로, 무엇보다도 육이오 때 잃은 아들을 만날 때, 고생한 엄마가 아니라 이런 근사한 옷 입고 살만큼 잘 살은 엄마라는 걸 보여주는 옷으로 말이다. 할머니는 이 세상 떠나가는 일을 군대 간 아들 첫 면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가슴 설레며 손꼽아 기다린 것은 아닐까? 그래도 한번 가면 오지 못하기에, 이 세상과는 작별해야겠기에, 담배 연기로 근사한 풍경 하나 그려, 내게 남겨 주려고 수의 곁에 늘 가루담배를 놓아둔 것은 아닐까?


할머니의 기도

할머니는 아침마다 세수하고 머리를 빗어 쪽을 졌다. 그리곤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이 부처님께 빌었다. “아이고 부처님, 자는 잠에 데려가 주이소.” 나는 아침마다 할머니가 부처님께 비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저리 오랜 기간을 날마다 정성을 모아 비는데, 듣는 이는 그 누구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인이 되고서는 할머니의 말을 들어줄 부처님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할머니에게 이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할머니의 삶이므로.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몸은 별 이상이 없었다. 할머니가 저기 칠성댁이 왔다. 저기 ㅇㅇ 이 왔다 등 죽은 사람이 찾아왔다는 말을 종종 했다. 이런 증상이 시작된 후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할머니는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그 길로 돌아가셨다.


잠자리에 누운 할머니의 숨결이 여느 때와 다르다는 것을 안 동생이 부모님에게 알렸다. 집에 있던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할머니는 새벽에 돌아가셨다. 눈 한 번 안 뜨고. 할머니의 기원은 이루어졌다.

저세상으로 간 할머니는 누구를 가장 먼저 만나러 갔을까? 가족의 안녕을 빌던 그 조상신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닐 것이다. 누런 삼베 수의를 갈아입지도 않은 채 할머니는 육이오 때 잃은 삼촌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데 얼굴도 보지 못한 삼촌이 그립다. 나는 저세상 가면 누구에게로 달려갈까? 아직 모르겠다. 나도 할머니처럼 달려가고 싶은 누군가가 생길까? 어쩌면 나는 할머니도 아버지도 아니고 그 사람이 삼촌일 수 있겠다. 나는 왜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삼촌을, 내 죽음 앞에서 떠올리는 걸까?

할머니의 셈법

할머니는 한글을 읽지 못했지만, 이자 계산만큼은 놀라울 만큼 빠르고 정확했다. 나는 종종 할머니와 ‘이자 계산 놀이’를 했다. “할매, 100만 원을 이자 2부로 7개월 빌리면 원금은 얼마고, 이자는 얼마야? 그럼 원금과 이자를 합하면 모두 얼마지?”

먼저 빌린 돈의 이자와 원금을 계산했다면, 다음에는 빌려준 돈의 이자와 원리금을 물었다. “할매, 150만 원을 빌려줬어. 이자는 1.5부로 1년 뒤에 받기로 했어. 그럼 1년 뒤에 이자는 얼마지? 원금과 이자를 합하면 얼마 받아야 돼?”


할머니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원금과 이자를 합한 금액을 척척 맞췄다.

“2 ×1은 얼마야? 3 ×3은 얼마야?” 혹은 “100이 50개 있으면 몇 개가 되지?” 같은 질문에는 할머니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숫자 뒤에 ‘원’을 붙여 “100원이 50개 있으면 얼마지?”라고 하면 순식간에 알아맞혔다.

숫자 셈법을 전혀 모르던 할머니가, 돈의 단위 ‘원’만 붙이면 산수 천재가 되었다. 그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억척같이 자신만의 셈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할머니도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멋지게 자신의 삶을 펼쳤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입양된 나의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능력’이라는 씨앗이 내 안에도 잠들어 있음을 보았다. 시대와 사회의 관습이 그것을 가로막아 내가 자유롭게 날지 못했다.


예부터 내려오던 그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란 걸 이제 안다. 어떤 삶을 살든, 그건 개인의 몫이고 그 사람의 자유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셈법인, 담배 연기로 슬픔을 그리는 화가로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 지금 내 삶의 셈법은, 내 시선으로 본 세상을 글로 쓰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셈법으로 살아가요. 그 셈법 언제든 바꿀 수 있어요.”라고 세상에 대고 외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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