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나는 할머니의 마른 젖을 빨며 어머니와 분리되어야 했던 나의 첫 세계를 이야기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제인 에어와 내가 서 있던 가장 근원적인 공통의 땅을 발견했다. 우리 둘 다 ‘엄마가 없는 아이’, 즉 고아였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운명은 그 부재의 성격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제인은 어머니가 죽어 곁에 없었고, 나는 어머니가 살아 있었지만, 할머니가 엄마와 나 사이에 끼어들어서다.
어쩌면 제인보다 내가 더 잔인한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인은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애도할 수 있었지만, 나는 눈앞에 살아 있는 어머니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나는 ‘애도할 수 없는 고아’로 상실을 인정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멜랑콜리 속에 갇혀 있었다.
할머니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나는 처음에는 서로 마주 보며 안타까워했다. 어느 날 엄마가 산더미처럼 쌓인 일들을 해내기 위해 먼저 눈길을 거두어갔다. 나는 할머니란 장벽 앞에서 엄마 품에 안기고 싶고, 엄마와 살을 맞대고 싶은 마음을 삭여야 했다. 일방적으로 엄마를 바라만 보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나도 눈길을 할머니에게로 돌렸을 것이다.
제인의 고아됨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면, 나의 고아됨은 할머니의 욕심과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제인에겐 폭력적인 외숙모와 존 리드가 있었고 내게는 할머니의 마른 젖과 엄마의 빈자리가 있었다.
조련사와 정원사
제인과 나는 전혀 다른 법칙의 세계에 ‘던져졌다. 제인은 동물원에 던져졌고 나는 분재원에 던져졌다. 하이데거가 인간은 원하지 않은 상황 속에 던져지고 그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제인의 세계의 법칙은 제인이라는 야생동물을 길들이려는 '조련사'(리드 부인)의 감정 그 자체였다. 이 감정은 원시시대 야생 들판의 맹수처럼 언제 날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제인은 살아남기 위해 긴장하고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리드 부인은 제인이란 존재를 자신의 세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파괴적인 욕망을 가졌다. 그녀는 제인에겐 동물의 야성을 꺾으려고 기어코 죽이고 마는 조련사였다. 조련사 리드 부인과 조수 존 리드는 제인을 권위적인 말과 제인을 처참하게 만드는 말들을 하고 폭력을 가했다.
조련사는 제인의 야성을 꺾고 파괴하려 했지만, 제인은 그 폭력에 맞서 자신의 야성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이렇게 획득한 제인의 생존 전략은, 그녀가 삶의 주도권을 쥐는 첫걸음이 되었다. 그 저항의 힘은 로우드 기숙학교라는 또 다른 척박한 세계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끝내 성장하는 뿌리가 되어주었다."
나의 세상은 정원이 아니라 분재원이었다. 그곳은 ‘가부장제’와 ‘장손제일주의’라는 일관된 규칙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나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고, 규칙에 순응하는 한 생존만이 아니라 사랑까지 보장되었다. 정원사(할머니)는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자신이 원하는 '작품(분재)'으로 빚어냈다."
할머니는 햇빛인 엄마를 향해 뻗어 나가는 가지를 잘라냈다. 남아 있는 가지마저 자신을 향하도록 철사를 감아 구부렸다. 나는 할머니가 구부리지 않은 가지마저 할머니를 향하도록 구부렸다. 철사에 감겨 구부리느니, 먼저 구부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해서다. 나의 생존술은 엄마를 향해, 가지를 뻗으려는 나의 본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란 화분 속에서 생존하기 딱 알맞은 분재가 되었다.
내가 살던 ‘분재원’은 불공정한 세계였다. 그곳엔 어떤 나무는 가장 높은 중앙에 놓여 햇빛이 남아돌았다. 어떤 나무는 구석 그늘에 놓여 햇살이 모자라 제대로 자랄 수가 없었다. 이 일은 분재원을 설계한 사람, 할머니가 가부장제를 신봉하기 때문이었다. 가부장제는 할머니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할머니 역시 가부장제의 희생제물이었다. 그런데도 할머니 역시 사회구조 속에서 내려오는 이 종교에 손녀인 나를 희생제물로 바치고 말았다.
여기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나무는 장손이었다. 할머니는 이 분재원의 규칙을 가장 충실히 따르는 신도였다. 그녀는 장손인 첫째 남동생을 가장 중심에 두었다. 이 규칙은 남자였지만 장손이 아닌 아기인 작은 남동생마저도 컴컴한 작은 방으로 쫓겨나야 했다.
나는 결코 정원의 중심에 설 수 없었다. 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장손이 아니었던 둘째 남동생보다는 더 중심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었다. 정원의 가장 중요한 자리(제단)는 언제나 첫째의 몫이었고, 나는 제단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가 누리는 특권을 지켜봐야 했다.
이는 왕자로 태어나,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왕이 될 교육을 받지만, 둘째라서 영원히 왕이 되지 못하는 왕자의 비애 같은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할 운명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왕이 될 첫째 왕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형이 왕이 되면 언제든 제거당할 수도 있는 자리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보고 늘 조심해야 하는 둘째 왕자의 운명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이다. 나 또한 더 밀려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할머니 옆에서 맴돌아야 했다.
엄마는, 마땅히 자신의 나무들을 돌보아야 할 정원사였지만, 대정원사인 시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그 자격을 박탈당한 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말했듯, 나는 이 정원의 규칙 속에서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 ‘중심이 아닌 주변인’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내 영역을 지키지도 못했고 내 방식대로 줄기를 뻗지도 못했다.
제인은 공포 속에서도 자신을 지켰고, 붉은 방에서 저항의 불씨를 품으며 원하는 대로 줄기를 뻗었다. 나는 푸른 방에서 ‘순응해야 살아남는다고 인식했기에 있는 듯 없는 듯 나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공식을 품고 생존했다. 두 길은 다르지만, 억압 속에서 주체성을 배우고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본질은 같았다.
제인 에어는 동물원의 '철창'을 부수고 나와 드넓은 황야에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갔다. 나는 뒤늦게 나를 가두던 '화분'을 깨고 '분재원'의 인공적인 흙이 아닌, 거친 '야생의 흙'에 스스로 다시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제인에 비하면 더디고 서툴 수밖에 없다. 그녀는 '조련사'에게 저항하며 야생성을 지켰지만, 나는 '정원사'에게 순응하며 야생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는 각자 '던져진' 그 자리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갈 뿐이다.
제인은 제인의 길을 갔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나는 분재원에서 살던 시절을 부끄럽게 여기 지도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곳의 일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일들이었을 뿐이다.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닌 내 꿈, 숲을 향해 뿌리를 뻗어갈 것이다. 자유롭게, 그리고 살아 있음을 경탄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