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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비친 나, 즉위식과 폐위식

푸른 방에서 나온 그녀, 나의 이야기

by 할수 최정희

제2장 3 인문학에 비친 나

즉위식과 폐위 의식

태초에, 모든 아이는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신(神)이다. 울음으로 천지를 창조하고, 웃음으로 세상을 축복한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남동생의 백일사진을 찍던 날, 우리 집 마당에서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신성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신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나를 산에서 폐위하는 의식이.

그들은 그들을 축복하던 신을 폐위하는 의식을 아주 성대하게 거행했다. 새로운 신의 즉위식이 바로 폐위 의식이었다. 새 신의 즉위식이 화려할수록, 추방당하는 신은 더 후줄근해진다.


남동생 백일사진 의식을 지켜본 사람 중에 이 의식이 나를 폐위하는 식이란 걸 알아챈 사람이 있었을까? 세 살배기 나는, 이 잔치가 나를 추방하는 의식이라는 것 알아챘는데. 이 사실은 나는 알고 어른들이 모르는 이유를 추정해 보았다. 나는 아직은 신이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고. 어른들이 백일사진 찍는 일이 즉위식인 동시에 폐위 의식인 걸 모르는 것은 이들이 너무 오래전에 추방당한 자여서일 거라고. 그때와는 다른 형식의 의식이라서 그럴 거라고.

새로운 신의 강림과 제기가 된 나

툇마루 위의 아기는 단순한 아기가 아니었다 — 그는 가문의 계보를 잇는 ‘왕세자’였다. 사람들의 환호는 아이 자체가 아니라, 그 몸에 응축된 ‘계승의 표지(작은 성기)’에 대한 것이었다. 그 표지는 이 집안이 계속될 것이라는 보증, 곧 그들의 옥새였다.

모든 신의 강림의식에는 제물이 필요하다. 이 신화의 가장 큰 비극도 다른 신화와 마찬가지로 여자아이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사람들은 마을 사람이나 가족의 안녕을 위해 신에게 바칠 희생제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희생제물을 외부에서 구하지 않고 내부에서 구한다. 이들은 미리 점찍어 놓는다. ‘여성’ 혹은 ‘장녀’로. 마을이나 가족의 안녕을 위하는데 점 찍힌 여성도 마을 사람이고 가족인데 이 사람의 안녕은 무시된다. 왜? 한 사람을 무참히 짓밟아 놓고도 그 사람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의식이 없는가?


‘가부장제’와 ‘장손제일주의’이라는 신에게도 사람들은 여성을 바친다. 내가 동생을 위한 ‘받침대’가 되어 새로운 신의 강림의식에 쓰일 ‘살아있는 제기가 되었다. 내 이름과 개별성은 지워지고, 새로운 신을 떠받드는 ‘기능’만 남게 된 것이다.

툇마루 위 앉아서 남동생을 안았을 때 내 몸에 전해진 바닥의 찬 기운과 남동생이 따뜻한 체온이 대비되면서 나는 내가 겪는 충만과 비참의 차이를 몸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관찰자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까? 어떤 아이는 떼를 쓰면서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데 나는 왜 욕구를 감추었을까?


아이들은 울음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는데 그날 나는 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나의 세계를 넘겨주었을까? 나의 세계는 그들이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기 전에 잠시 거쳐가는 길목이었다, 욕구를 감춘 것은 체념이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나의 욕망은 신성한 의식을 방해하는 불경한 소음이 될 뿐이었다. 나는 내 세계가 아니라 나를 지켜야 했다.


나의 침묵은 백일잔치 하는 동안 가족의 평화를 지키고 가족의 체면을 지키고 나를 지키는 이 셋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었다. 세 살배기 아기가 어려운 삶의 셈법을 척척 해내다니! 원리금과 이자 계산을 척척 해내던 할머니를 닮아서 내가 삶의 법칙을 잘 계산했던 것이 아닐까.

새로 쓰는 탄생 신화

이 희생제의가 끝나고, 마당이라는 신전에는 새로운 우주가 창조되었다. 장손인 남동생은 가족을 비추는 ‘태양’이 되었고 나는 ‘달’이 되었다. 장손인 남동생 태양이 있는 동안, 내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하늘의 해는 낮과 밤이 있어서 밤 동안에 달은 빛날 수 있다.


이는 공평한 거래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달이 더 이득이다. 태양은 달이 있든 없든 빛날 수 있지만, 달은 태양이 있어야 밤에라도 빛날 수 있으니까. 나는 빛날 기회를 갖지 못하는 허울만 달이었다. 남동생이란 태양은 24시간 지지 않은 해로 일 년 365일 내내 떠 있어서다.

푸른 방에 갇힌 소녀 이야기는, 나의 ‘창세 신화(Creation Myth)’이다. 이 일은 내가 어떤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주변인’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슬픈 기록이다. 내가 앞으로 써 내려갈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불평등한 창조 신화를 부정하고, 나 자신이 스스로 우주를 창조하는 새로운 신이 되기 위한, 스스로 앞길을 밝히는 해가 되는, 길고 긴 투쟁의 연대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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