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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두 개의 기원

푸른 방에서 나온 그녀 나의 이야기

by 할수 최정희


제2장 1


기억, 두 개의 기원 니 속깽이구나!

나는 어릴 때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나들이 갔던 기억이 있다. 이때는 3살 무렵으로 그곳엔 할아버지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친척 모임인 것 같았다. 이곳에 아이를 데려온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한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더니 아버지에게 말했다. “니 속깽이구나.” 이 말에 아버지 얼굴이 구름 사이로 내비친 햇살처럼 환해졌다. 이어서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충만함이 미소로 떠올랐고 점점 몸 전체로 번져나갔다. 한지에 물감이 번지듯.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아버지를 충만하게 하는 존재가 바로 나인 것을 느꼈다. 이 느낌에 이어 마음 한구석이 따끈해졌고 이 따끈한 온기가 점점 퍼져 내 가슴을 데웠다. 나도 내 세상이 이미 가득 찬 듯 더는 바랄 것이 없는 그런 충만함을 느꼈다.

“니 속깽이구나.” 이 말은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닻을 내리게 한 첫 번째 문장이었다. 나는 그저 ‘나’였지만, 그 순간 나는 ‘아버지의 딸’이라는 분명한 신분을 부여받았고 나는 이 신분이 흡족했다. 내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내 몸과 마음에 솜사탕의 달콤한 향기와 맛이 퍼졌다.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이처럼 타인의 부름과 시선 속에서 이루어진다.

"어린아이는 타인의 얼굴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씨앗에서 나온 새싹이 뿌리로 흙 속을 더듬으며 돌을 피해 가고, 습기를 따라 뻗어가듯, 아이도 타인의 얼굴에 비친 자신을 보며 자신이 뻗어갈 세상의 높이와 넓이를 가늠해 간다.

그날 아버지의 얼굴은 나를 비추는 전신 거울이었다. 나 자신이 그저 작고 여린 어린아이가 아니라, 한 어른의 세상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는 그런 밝고도 커다란 빛이었다. 어쩌면 평생 나를 지탱해 준 한 줌의 자존감은, 바로 그날 아버지의 눈 속에 반짝이던 아침 햇살 조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나의 한 기억은 이처럼 빛의 축제였다.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이토록 강렬한 빛이 있기에, 내 삶의 다른 한편에서는 그만큼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 두 개의 기원, 즉 아버지의 충만함 속에서 태어난 ‘나’와 잠시 후 이야기할 이와는 아주 다른 ‘나’ 사이의 간격을 메꾸는 작업이 바로 나의 삶이 될 것을.

마당에 울려 퍼지던 찬가

내가 세 살 하고도 석 달이 되던, 하늘은 맑고 햇빛은 창창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동네 사람들이 왁자지껄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곧이어 친척들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모두가 그 사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오늘의 제의를 진행할 사진사였다. 사진사는 제의 진행자답게 능숙하게 마당에 삼각대를 세우고 지금 이 순간 가장 소중한 제구, 카메라를 삼각대에 연결했다.

곧 남동생의 백일사진을 찍는 거룩한 의식이 거행될 거였다.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은 카메라 주위에 모여들어 카메라를 바라보며 참배하기 시작했다. 사진사는 카메라를 참배하면 안 된다고 사람들을 물리치면서 앞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일제히 앞쪽 툇마루로 시선을 돌렸다.

제사장, 사진사가 활짝 웃으며 아버지에게 “오늘 날씨가 좋아 사진이 잘 나오겠다.”라고 말했다. 사람들도 덩달아 웃었다. 제사의 진행자신 사진사의 지시로 아버지가 남동생의 기저귀를 벗기고 쪽마루에 앉혔다. 사진사가 아버지에 세 남동생을 왼쪽으로 조금 옮겨 앉히라고 했다. 아버지는 말 한마디에 사진사의 시중드는 자로 전락했다.

참배자들은 “이제 백일사진을 찍나 보다.” 하며 첫째 남동생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아뿔싸! 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남동생은 균형을 잃고 기우뚱 쓰러졌다. 참배자들 사이에서 "아이코!", "에고!" 하는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는 사람들 다리에 부딪혀서 뒤로 밀려났다. 사람들 사이로 남동생이 보였다. 남동생이 기우뚱 넘어졌다. 사람들은 탄식하며 웅성거렸다. 나는 정체 모를 뭔가가 슬금슬금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고 곧이어 불안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할머니도 엄마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은 모두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다.

나는 정체 모를 뭔가를 곧바로 알게 되었다. 백일사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내게는 그런 사진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나를 사람들 다리 사이에 떠밀리게 그냥 둔 것이 서운하고 속상해서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런데 할머니와 엄마와 아버지는 이 사실에 조금도 마음이 쓰이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사랑에도 조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진 한 장이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집안에서 나의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증표이고, 나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제단 아래에 놓인 존재였다는 것을.


벽에 잠깐도 기대앉지도 못하는 남동생의 사진을 찍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면서,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면, 이 세상의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세 살배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질문이었다. 나는 아마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모든 관계의 이면을 의심하고, 그것의 진실성을 알아내기 위해 세상과 분리되어 끊임없이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

아버지가 다시 남동생을 제단 위 벽에 기대 앉히자, 참배자들의 찬탄이 쏟아졌다. “저 고추 좀 봐라!”, “자~알 생겼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남동생이 아니라, 여성에게는 없는, 그가 가진 남성성의 상징에 대한 찬가였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남성성의 상징을 향한 우렁찬 찬가는 나를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공표하는 선언문이라고.

내가 이 찬가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우리 집 마당은 시야에서 아득히 멀어졌다. 모든 장면이 흐릿해지면서, 나는 마치 다른 시공간에서 이 남성성을 찬미하는 의식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마당에 가족들과 참배자들과 함께 있었지만, 나는 아무와도 함께 있지 않은 존재였다.


나는 ‘내 사진도 찍어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할머니와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한다는 것을 말하거나 드러낼 수도 없었다. 아무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므로.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너도 사진 찍고 싶어?”라는 말을 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남동생이 자꾸만 옆으로 기울어져서 사진 찍기를 여러 번 실패한 후에, 누군가 외쳤다. "안 되겠다. 정희에게 안겨서 찍어야겠다." 마침내 내가 제단 위로 불려 올라갔다.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신성한 왕이 쓰러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받침대가 되어 남동생을 안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남동생을 안고 카메라 앞에 앉았을 때, 마룻바닥의 차가움이 엉덩이로 스며왔고, 나는 한기를 느꼈다. 남동생의 따스한 체온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임을 증명하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굴욕과 수치심 속에서 인식했다. 나는 그것이 없는 여자라는 것과 그래서 남동생과는 지위가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은 나와 남동생을 보며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그들 중에 나와 같은 여성들도 있었는데, 그때 그 여성들은 자신을 어떻게 여겼는지 궁금하다. 사진사가 하나, 둘, 셋 외칠 때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마침내 사진사가 의식을 끝났음을 선언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 환호성은 참배의식의 끝을 알리는 나팔소리였고 내게는 ‘너는 관찰자로 살아라.’라는 명령이었다.


제사장 사진사는 삼각대와 카메라를 거두어들였다. 참배자들은 제사장의 손길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사진사가 사진과 삼각대를 거두어들이는 것조차 성스러운 의식의 일부인 듯. 제사장이 제구를 들고 돌아가자 참배객들도 각각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 마당은 텅 비었고 고요해졌다. 나는 고요해지지 않았고 아침의 나와 다른 내가 되었다. 아침의 나는 이 세계의 일부였지만, 저녁의 나는 그 찬가가 내게 명령한 대로 이 세계를 관찰하는 자가 되었다. 그 의식은 끝났지만, 내 귀에는 아직도 그날의 찬가가 들려온다. 살아있는 동안 나를 따라다닐 그 소리 “저 고추 좀 봐라.” 이제는 그만 듣고 싶다.


그날 나는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너무 아픈 현실을 맨몸으로 겪어낼 수 없을 때, 사람은 스스로를 분리해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장소로 도망간다. 내게는 그게 관측소였다. 느끼는 대신 분석하고, 참여하는 대신 관찰함으로써 나를 지키려 했던 관측소는 외부의 상처를 막아주는 동시에, 세상의 온기가 내게 닿는 것 또한 막아버렸다. 나의 ‘푸른 방’의 기원이 바로 이날 내가 세운 관측소였을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이 지나 철학의 언어를 빌려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날 나의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재편되었는지를. 나의 두 기원은 한 인간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두 개의 근원적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나의 첫 번째 기원

나의 첫 기억은 아버지의 충만한 웃음의 순간은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말한 진정한 나-너의 만남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평가하거나 분석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를 그 자체로 온전하고 충만한 너로 마주했다. 아버지의 눈빛 속에서 나는 세상에 온전히 존재함을 느꼈다.


이것은 사랑의 감정을 넘어, 한 인격이 다른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나”로 태어나는 실존적 사건이다. “니 속깽이다”라는 말에 아버지의 변한 얼굴 표정은 너는 나의 일부이며 너의 존재가 나를 충만하게 한다는 선언이다. 이때의 나는 세상과 분리되지 않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였다. 제인이 유년 시절 내내 갈망했으나 가져보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두 번째 기원 남동생 백일사진 일화는 나 –그것의 세계로 내가 추방된 사건이다. 이 의식에서 세 살배기 소녀 나는 더 이상 온전한 네가 아니었다. 그녀 나는 고추가 없는 존재, 받침대가 되어야 하는 존재가 본질이었고 그 본질에 따라 평가를 받는 그것이 되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하며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했다. 그러나 그 제단 위에서 나는 사회가 부여한 여성이라는 본질이 나의 실존을 억압하는 폭력을 겪어야만 했다.

남동생을 안고 느꼈던 마룻바닥의 찬 기운은 한 인격체가 사물로 전락할 때 느끼는 실존적 추위였다. 이 추위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관찰자로 밀려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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