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이오 전쟁을 겪은 우리 가족 이야기를 퇴고하던 참이었다. 아버지가 매년 현충원을 찾았듯, 이젠 내가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매년 현충일에 가겠다.”라고 마음을 굳히는데,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아버지가 “이날을 기다려왔다. 딸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세 살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할머니 방에서 살았다. 할머니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말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삼촌이 전사했을 당시에는 소리 내 울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웠다. 기분이 좋아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피운다. 할머니는 담뱃대에 풍년 담배를 꾹꾹 눌러 담은 다음, 화롯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기다란 대나무 담뱃대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후—내뱉었다. 나는 할머니 입에서 뿜어져 나온, 슬픔이 배어 있는 하얀 연기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때로는 신기했고, 때로는 그 모습이 아련했다. 나는 이십 년 넘는 세월을, 할머니의 슬픔과 한이 배인 담배 연기가 날아다니는 곳에서 숨 쉬며 살아왔다.
우리 뇌 속에는 거울 뉴런, 즉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표정을 볼 때, 우리 뇌가 그 행동을 실제로 하는 것처럼 반응하며 따라 하는 세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얼굴을 찡그린 사람을 보면 보는 사람도 얼굴을 찡그리게 되고 웃는 사람을 보면 웃게 된다고 한다. 나는 할머니의 방에서 할머니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 느꼈을 것이다. 이렇듯 내 삶은 슬픔이 대물림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부모 세대가 겪은 충격적 경험은 직접 말해주지 않아도 정서적 분위기(affective climate)**와 무의식적 동일시(identification)를 통해 자녀 세대에게 전이된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겪은 상실과 울음이 집안 곳곳에 드라마의 배경 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배우의 대사만 듣고 배경 음악은 듣지 않으려 해도 드라마를 보는 중엔 배경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할머니 몸에서 흘러나온 감정이 공증을 흐르다가 내 몸과 마음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데도 마음이 시큰거린 이유가 될 것이고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솟는 이유가 일 것이다.
가족들이 웃는 웃음이 담장을 넘어가기도 했지만, 이 친구들이 우리 집 마당에서 침묵의 놀이를 했다. 그 이유를 하나로 단정할 수 없지만 그중 하나는 '다름'이라는 같은 뿌리다. 전쟁의 비극을 겪은 '슬픈 집'이라는 다름, 영혼결혼식 굿을 한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는 다름, 그리고 일꾼 옷을 입은 자기 아버지와는 달리, 말끔한 셔츠와 바지 혹은 양복 정장을 한 아버지가 사는''이라는 다름까지. 아이들은 여러 가지가 혼합된 '다름'이 풍기는 낯섦 앞에서, 자신들의 특성인 천진난만함을 거두어들였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도 소리치며 뛰놀 수 있다는 것을 친구들이 느낄 때까지, 내가 계속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다면 이 벽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발견한 벽은 내가 주인이 되어 친구들을 내 속에 들이지 않게 된 이 일로 생긴 벽이었다.
내가 회피전략을 선택한 것은 무엇에 도전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성취감을 얻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 도전에서 오는 불편을 겪고 싶지 않아서다. 이후에도 선택의 기로에 서면 어느 것이 더 편한가 가 기준이 되었다.
자아실현을 하려면 도전해야 한다. 무엇에나 도전하면 불편과 어려움이 따른다. 내가 불편과 어려움이 생기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성장하지 못했다. 즉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려고 할 때 넘어야 할 수많은 높은 산들이 보였다. 그래서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단념해 왔다. 내가 머리가 좋아 앞에 놓인 높은 산들이 죄다 보인다고 여겼다. 지난날 나는 성장하지 못해 많은 눈물을 흘렸는데, 이와는 다르게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할 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생각하고 마침내 그것을 이루었을 때의 기쁨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내가 높은 산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회피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혹은 불안을 일으키는 현장에서 도망가기에 바쁜 사람이 어떻게 마침내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지금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그것이 주는 힘듬보다 먼저 성취감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내 안의 불안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 살맛이 난다. 이 살맛은 아버지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장미나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집안 어른들 모임에 나를 데려갔을 때, 할머니 등에 업혀 다닐 때. 친구들과 산속을 뛰어나니며 진달래꽃을 따 먹을 때, 우물 청소를 하는 엄마를 바라볼 때 느꼈던 그 맛과 약간 결이 다르다. 그 이유는 그때는 다른 사람이 주는 살맛이었고 지금은 내가 내게 주는 살맛이다.
내가 사라졌다.
우리 대부분은 시간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나? 시간은 일정한 간격이 있고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그러면서 과거는 흘러갔고 현재는 흘러가고 미래는 흘러올 것이라고. 이 나의 관념을 뒤집는 사건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였다.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 눈물은 그 유족의 슬픔에 공감해서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소환된 것이었고 온전히 나의 것도 아니었다.
시간은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시간은 사람을 구별하고 그 사람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제멋대로, 지금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지금에서 미래로 넘나 뛰면서, 사람을 지금 이곳에 있지 못하게 하는 존재였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과거가 현재 속에 살아 숨 쉬며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시간의 흐름을 '지속(La Durée)'**이라고 불렀는데, 나의 눈물이 바로 과거의 지속이었다. 나의 눈물은 단순한 감정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들을 잃고 울어야만 했던 할머니의 시간, 동생의 묘소를 평생 찾아가는 아버지의 시간과 그 영향을 받으며 자라난 나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사건이었다. 지금 나는 사라지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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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물줄기를 그리는 소녀
질문이 생겼다. 나의 슬픔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라면, 내 것은 어느 부분이고 내 것이 아닌 것들이 왜 내 속에 있으며 어디에서 온 것들인가 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먼저 또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아버지다.
열네 살에 가장이 된 소년. 내 아버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장남'과 '가장'이라는 운명의 푸른 제단 위에 올려졌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하는 그에게, 자유는 선택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책임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태어날 장소도, 부모도, 시대도 선택할 수 없다. 나 역시 전쟁이 남긴 슬픔의 강가에서 태어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듯 아버지도 그랬다. 아버지도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를 잃는 바람에 그 꿈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처럼 아버지도 아팠을 것이지만 얼마나 아팠는지는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를 선택할 **'자유(Freedom)'**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했다.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떠내려온 '슬픔의 강'이 어디서 발원했고, 어떤 지류와 만나 지금에 이르렀는지, 보이지 않는 '강물의 흐름' 즉 내 삶의 맥락을 알고 그것을 해석하고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다. 를 그리기 위해서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 있다. 굴러가던 유리컵이 이 식탁 끝에 다다르면, 곧장 바닥으로 떨어져 깨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컵이 굴러가 깨질 것이라는 맥락을 알고 그래서 컵을 잡으면 컵은 굴러가기를 멈추고 깨지지 않는다.
우리 삶의 흘러가는 맥락을 알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가 보인다. 그래서 그 삶을 멈추게 하고 흘러가는 게 아니라 내가 잡은 방향대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게 바로 자유가 아닌가. 이 글쓰기는 대물림된 슬픔을 분석하고 명명함으로써, 자유롭게 살아가려고 하는 나의 의지다.
기억과 망각
나는 오랫동안 내 슬픔이 오롯이 나의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회학의 렌즈를 통해 나의 가족사를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의 슬픔은 이 사회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 선택하는 거대한 '기억의 정치(Politics of Memory)'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이태원의 통곡이 거리에 울려 퍼질 수 있는 시대와, 삼촌의 죽음을 문 안으로 삼켜야 했던 시대. 이 두 시대의 간극은 단순히 세월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개인의 비극을 어떻게 다루는 가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기억이란 지극히 사회적인 행위이며, 사회는 필요에 따라 특정 기억을 선택하고 강화하는 **'집합적 기억(Collective Memory)'**을 만들어간다고 말했다. '한강의 기적'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야 했던 대한민국에게 6.25의 상처는 서둘러 잊고 봉합해야 할 과거였을지 모른다.
수십 년간 현충원의 잊힌 묘역을 홀로 찾았던 그 아버지의 침묵 순례는, 국가의 '공식적 망각'에 맞서 한 개인이 벌인 가장 길고도 외로운 투쟁이었다. 그는 잊히도록 강요된 역사를 자신의 발걸음으로 다시 써 내려가고 있었다.
상이군인의 텅 빈 바짓가랑이와 '쥐꼬리'만 한 보상금은, 국가라는 거대 서사 아래 개인의 고통이 어떻게 삭제되고 하찮게 취급되었는지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사회적 증거물'이다.
사회적 각본
우리 집에서는 친구들이 모두 조심했다. 아이들의 웃음과 재잘거림을 빼앗아 간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이들은 동네 사람들이 짠 각본 즉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 말한 사회적 각본에 따라 행동한 것 같다. 우리 집에서는 우리 가족이나 내가 짠 각본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따라 한 각본의 저자는 동네 사람들이다. 이들이 입을 모아 ‘저 집은 슬픈 집’ “굿을 한 집‘이라 낙인을 찍은 각본은 우리 가족과 내가 짠 각본보다 힘이 셌다. 권력 앞에서 아이들도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당시 농촌 사회에서 면사무소에 다니는 아버지의 하얀 셔츠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속해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아이들이 우리 마당에 조심하면서 행동한 것에는 이런 이치도 작용했다고 해도 될까? 사람들이 대체로 편안한 옷을 입은 사람 앞에서보다 옷을 격식 있게 차려입은 사람 앞에서 더 조심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 말이다.
슬픔의 사회학
이 모든 조각을 맞추며 나는 깨닫는다. 이 책을 쓰는 행위는 단순히 개인의 과거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선다. 이것은 국가의 공식 역사와 가족의 침묵 속에서 제대로 명명되지 못했던 나의 슬픔에 사회학적인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이다.
내가 떠내려온 '슬픔의 강'은 결코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 기억이 통제되고, 가부장제라는 구조 속에서 소년과 소녀가 희생을 강요당하며, 계급과 문화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드는, 이 모든 사회적 힘들이 합류하여 만들어낸 거대한 물줄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쓴다. 내가 걸어온 강물의 지도를 그리는 이 행위는, 내 자식들이 더 이상 이 물길에 무력하게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개인의 치유를 넘어, 망각을 강요하는 사회에 맞서 한 개인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나의 사회학적 실천이자,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나의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