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이오를 겪은 내 가족 이야기
푸른 방에서 나온 그녀, 나의 이야기
제1장 1 가족 이야기
1. 육이오 전쟁을 겪은 내 가족 이야기
슬픔의 강물
이태원 참사 뉴스를 보았다. 한 유족이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떨리는 어깨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슬픔의 곡소리는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한 유족은 소복을 입은 채, 길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두 손으로 땅바닥을 치며 울었다. 이 유족들의 울음소리가 가슴속에 들어와 메아리로 울었다. 내 몸이 차츰 내 몸이 메아리가 되어 울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서서 그 유족들을 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유족들은 가족을 모두 잃고 세상에 홀로 남은 듯 울부짖었다. 그들은 슬픔과 애통함의 계곡이 깊어 옆에서 울고 있는 가족과도 단절되어 있었다.
나는 저 풍경이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집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육이오 때 삼촌이 전사한 이후 태어났다. 삼촌의 전사 통지서가 날아들었을 때, 할머니와 아버지와 고모도 저렇게 울었으리란 걸 알아차리는 순간 심장이 흔들리며 가슴 벽을 쳤고, 눈에서는 눈물을 쏟아졌다.
이 눈물은 내 눈물이라기보다, 아직 마르지 않은 옛 울음이 내 몸을 통과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인간의 눈물이란 그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세대를 따라 흘러내리는 강물인가 보다.
누가 말했던가. 강물처럼 시간이 흘러간다고. 이 말을 한 그 사람에겐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나는 같은 구절이 반복되는 도돌이표가 많은 음악처럼 구간반복적 삶을 살았다. 이태원 참사 유족의 통곡 소리는 과거의 슬픔을 불러내는 도돌이표였다. 시간은 다시 돌아가 할머니와 아버지와 고모들이 삼촌의 전사 통지서를 붙잡고 통곡하던 장면을 눈앞에 부려놓았다. 이 순간 이태원 참사 유족의 울음소리가 할머니와 아버지와 고모의 울음소리로 치환되었고 나는 그때 가족들 옆에 있는 듯 그 고통과 아픔을 실제로 경험하였다.
어렸을 땐 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코가 시큰해지고 마음이 아려왔고. 성인이 되어서도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도 울컥 눈물을 쏟을 때가 많았다. 나는 내가 왜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데 슬픔이 몰려오고, 개그 영화 속 양념처럼 들어있는 슬픈 장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눈물을 쏟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알아가고 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이 나의 것만이 아니라, 할머니와 아버지와 고모와 엄마에게서 내 안의 호수로 흘러들어 온 눈물이, 내 속에서 찰랑거리다가 넘쳐흐르는 것임을. 내가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나, 코미디 영화를 볼 때 남들은 웃어넘기는 장면에서 내 눈엔 눈물이 솟구치는 이유도 짐작하게 되었다. 물이 가득 찬 컵은 작은 흔들림에도 출렁거리고 때론 넘쳐흐른다. 내 안의 눈물도 이와 같은 이치로 사소한 자극에도 심장이 쉽게 흔들리고 눈물이 가장자리를 넘쳐흘러내린 것이다.
삼촌은 육이오 전쟁 금화지구에서 전사하여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할머니가 갓 시집온 엄마에게 “시동생 잡아먹었다.”라며 화를 내었다고 한다. 이 일은 할머니의 슬픔이 너무나 커서 정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화다.
엄마는 삼촌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전사한 가족의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또 내가 목격한 삼촌의 영혼결혼식 굿은 내가 태어난 후에도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일이다. 나는 가족 중 누구도 삼촌이 전사한 슬픔으로 눈물 흘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말하는 것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육이오 전쟁에 삼촌이 전사한 슬픔을 그때그때 흘려보내지 못해, 억압된 슬픈 감정이 할머니의 몸에서 스미어 나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잘 웃고 장난기도 많다. 죽이 맞는 사람하고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배 아프도록 웃기도 한다. 내가 태어난 후에 가족들은 웃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웃음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갓 태어난 아기가 가진, 생명의 에너지로 그들 마음에 작은 불꽃이 하나 일어났을 것이다. 이 불빛으로 인해 종종 환하게 웃었을 것이고 이것이 아기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또 할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과 나라는 존재 자체를 온전히 지지해 주었던 아버지의 따뜻
한 미소와 그가 가꾼 마당의 꽃밭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을 경험하면서 자란 덕일 것이다. 농촌에서 자라며, 저수지와 숲과 논과 들판과 개울과 텃밭에서 만난 식물들과 곤충들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웃음을 잃은 것은 대학진학과 꿈, 즉 내 삶을 포기해야 하면서다. 이는 내가 죽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침묵의 놀이
동네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아무도 떠들지도 뛰어놀지 않았다. 철부지 아이들이 어
른들이 아무도 없는데도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우리 집에서 아무 말을 하지 있던 아이들이 옆집 친구네 집 마당으로 이동해 가면 곧바로 재잘거리며 소리치며 뛰어놀았다.
그때 나는 친구들의 부모는 모두 농사를 짓는데,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다녀서 집안 분위기가 좀 달라서 그런가 했다. 나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하게 있는지 이유는 몰랐지만, 나의 세계와 다른 아이들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계기였다.
이날 이후 나는 외부 세계로 향한 문을 닫고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이때 나는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은 것만 아니라, 왜 마음속 문까지 닫고 친구들을 들이지 않게 된 것일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알 수 없는 불편함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어린 나의 본능적인 자기 방어였고,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이 아닌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전략이었다.
친구 집에서 친구와 노는 것은 손님으로서 이고 내 집에서 친구와 노는 것은 주인으로 노는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서로 얻는 것이 상당히 다르다. 나의 회피전략은 친구와 주인으로서 놀 때 생기는 이점을 얻을 수 없기에, 사실상 실패다. 그런데 나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편함을 없애주었기 때문에 이 전략이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후 이 일을 모델로 삼고 회피전략을 사용하게 된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내 마음에 벽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수첩에 내가 한 행동과 내가 한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나의 반응 행동을 적어가며 생각하고 노력했지만, 그 벽을 깨부술 수 없었다.
어린 나는 그 불편함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기에 나와 타인 사이에 이 벽을 만든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쌓은 그 벽은 나를 외부 세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해 주었지만,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오는 즐거움과 따뜻함을 느낄 기회를 차단해 버렸다.
친구들은 부모님이나 동네들이 저 집엔 육이오 때 아들이 죽었다고 그때 어떻게 슬피 울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을까. “저 집은 굿을 한 집이야. 귀신이 마당에 있을지도 몰라.”라며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을까. 그래서 철부지 아이들이지만 우리 집에서는 함부로 장난을 칠 수 없었던 걸까. 그 친구들은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우리 집 마당에서 아버지가 키우던 가시가 달린 선인장들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때를.
할머니의 작은 주머니
다섯 살 무렵 할머니가 반다지 문을 열고 작은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할머니는 하얀 무명천 주머니의 입구를 벌려 그 속에 뭔가를 넣었다. 그리고는 할머니는 주머니 입구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주머니 입구는 할머니 입처럼 꼭 다물었다. 나는 할머니와 주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입을 꼭 다물고 있는 할머니에게서 풍겨 나온 기운이 무슨 안 좋은 일을 당한 사람 같아 보였다. 그게 무엇이지 궁금했지만, 자석의 S극과 N극이 서로를 끌어당겨 착 붙어버리듯, 나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달라붙어버렸다.
삼촌의 목숨값이 든 그 주머니를 두 손에 쥐고 가슴에 꼭 품어보고 싶다. 주머니 속에는 할머니의 슬픔이 가득할 것 같기도 하고, 삼촌의 슬픔이 그득 들어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와 고모들의 슬픔 또한 그득 들어있겠지만, 그 슬픔은 사랑으로 인한 것이라 하얀 그 주머니는 참 따뜻할 것 같다. 그리운 것은 사람만 아니라, 그 사람과 관계된 장소나 물건들도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떠나간 사람이 쓰던 물건을 왜 쓰다듬는지를 이제 알겠다.
이로부터 얼마 후 할머니와 엄마가 말하는 것을 듣고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남동생이 있었는데 육이오 때 참전한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주머니에 넣은 것은 나라에서 주는 죽은 삼촌의 목숨값이란 걸. 그게 쥐꼬리라는 걸. 아들 목숨값을 어디 돈으로 보상이 되겠는가! 아무리 많이 준들. 삼촌의 쥐꼬리 목숨값이 나올 때마다, 할머니는 줄을 당겨 오므린 주머니 입구처럼 입을 다물었다. 정해진 의식절차처럼.
할머니가 때로 긴 한숨을 쉬기도 하고 때로는 마루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종종 할머니는 긴 대나무 담뱃대에 풍년 가루담배를 꾹꾹 눌러 담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입속 가득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후 우~ 길게 내뿜었다.
할머니는 담배 연기로 허공에 슬픔을 그리는 화가였다. 담배 연기가 공중에 하얀 구름처럼 뭉글거리다가 안개처럼 퍼져 나가면서 점점 옅어지면 할머니는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뿜었다. 그러면 공중에 하얀 슬픔이 피어나 모락거리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죽은 삼촌처럼 흔적 없이.
할머니보다 대작을 그린 화가는 없을 것이다. 할머니의 슬픔인 담배 연기는 할머니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우리 집 마당을 지나 장미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 흙담을 넘어갔다. 이렇게 우리 집 밖으로 나간 담배 연기는 산을 넘어 들판을 지나 경부고속도를 달려 서울 국립묘지 현충원까지 날아갔을 것만 같다. 담배 연기가 할머니 대신 “아들아 보고 싶다. 거긴 춥지 않냐?” “이번 추석에는 얼굴 좀 보자.”라며 비석을 어루만졌을 것 같다.
가끔 집에 구걸하러 오는 상이군인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한쪽 다리가 없었는데, 한쪽 바짓가랑이는 홀쭉하게 비어있었다. 그 사람이 목발 짚고 성한 발을 내딛을 때, 바짓가랑이가 힘없이 흔들거렸다. 성한 발을 딛고 목발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을 때 바짓가랑이는 더욱 흔들거렸다. 어떤 상이군인들은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후크 선장 같은 쇠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이 군인이 팔을 들어 올릴 때 옷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세 갈래로 구부러진 쇠갈고리가 나는 무서웠다.
그 시절엔 영화관도 TV도 없었기에 전쟁에서는 총을 들고 어떻게 싸우는지 세세한 일은 몰랐지만, 전쟁이 참혹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불구의 몸이 된 상이군인을 볼 때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전쟁이 데려간 삼촌 생각이 났다. 나는 삼촌이 그리웠고 옆에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맏이라 언니도 오빠도 없어서 더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현충일이 되면 국립묘지 현충원에 동생을 보러 갔다. 자신의 몸이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을 때까지 매년 빠짐없이. 나는 한 번 간 적이 있다. 이때는 아버지와 엄마 고모와 고모부와 내가 함께 갔다. 삼촌의 묘지는 육이오 전사자 묘지 중 금화지구에 있었다.
우리가 국립묘지에 갔을 때 월남 파병 전사자 묘지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육이오 전사자 묘지는 적막했다. 따가운 햇살 아래 비석들이 목을 길게 빼고 가족이 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비석의 겉은 딱딱한 돌이지만, 속은 눈물로 채워져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어깨를 툭 치듯 반가움을 표현하면, 비석이 울컥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비석을 살살 쓰다듬는 것은 비석이 눈물을 쏟아낼까 염려해서일까?
이곳에 찾아오지 않은 가족들은 세월이 흘러 모두 잊은 것일까? 이 많은 전사자의 가족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닐 텐데. 저들 전사자 가족들도 이태원 참사를 당한 가족처럼 몸부림치며 울었을 것인데. 죽음이 무엇이고 시간이 무엇이란 말인가!
멀리서 한 사람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한 라디오 방송 기자인 그가 아버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넓은 육이오 전사자 묘지에 딱 한 가족이 와 있으니까, 어째서 저 가족은 지금에도 찾아오는 걸까 하는 질문이 생겼던 모양이다. 라디오 방송 기자의 질문에 아버지가 한 말을 그대로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젊은 나이에 간 동생을 어찌 잊을 수 있겠냐.”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의 육신이 묻힌 그곳에서 동생의 체온을 느꼈을까? 아니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울던 어린 동생을 떠올렸을까? 삼촌이 아버지에게 “형, 내년에도 또 와.”라는 말을 했을까? 그래서 아버지는 매년 엄마 혹은 남동생들을 대동하고, 현충원에 갔을까? “동생아, 나 결혼했어. 형수 이쁘지?” 혹은 “내 아들이야.”라며 아내와 아들을 동생에게 보여주러 간 걸까?
아버지는 평소에 삼촌에 대한 말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수십 년을 현충일이 되면 꼬박꼬박 현충원 삼촌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침묵의 순례를 하며 동생을 잃은 슬픔을 평생에 걸쳐 기억했다. 사랑은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하게 그 대상을 찾아가는 거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이제 아버지가 삼촌을 찾아가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삼촌은 한두 해 아버지가 찾아오지 않자 “아이고 우리 형님 이제 세상에 안 계시는구나.”라며 울었을까 이제는 뒤바뀌어서 아버지가 그리워하던 삼촌이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 같다.
나는 현충원에 있는 삼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거의 50년 전, 딱 한 번 찾아간 나를, 이젠 할머니가 된 나를 삼촌이 알아볼까? 이 문장을 쓰는데 또 왜 가슴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흐를까? 나는 사람들이 왜 죽은 가족을 보기 위에 묘지를 찾아가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가고 싶은 곳은 할머니의 묘소도 아버지의 묘소도 아니고 왜 생전에 보지도 못한 삼촌일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한 끝에 깨달았다. 내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할머니와 아버지 삼촌이 아니라,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우리 가족의 슬픔의 근원’이란 것을.
슬픔의 근원
어느 날 친정에 갔을 때였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그게 언제인 거지?’ 하는 궁금증이 일어서 옆에 있는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장남인 아버지가 14살 때였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아버지는 소년 가장이 된 것이다.
가부장제는 장남에게 가장의 '권위'와 집안일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지만, 아무리 소년이라도 자신의 삶을 통째로 가족을 위해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할 수도 있다. 아버지가 바로 이런 경우였고 가부장제 그 제단 위에 올려진 어린 소년이었다.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예순 살이 넘었을 때다. 나도 살 만큼 살아 본 터라, 어린 14살의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른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짐작이 갔다. 아버지의 병과 죽음 앞에서 그 어린 소년은 얼마나 슬프고 무서웠겠는가. 19살의 나도 아버지가 폐결핵에 걸렸을 때 혹시라도 돌아가시면 하는 생각으로 멘붕에 빠졌었다.
어린 소년이 아버지가 되어, 힘겹게 어린 동생을 보살폈는데, 스스로 살아갈 나이가 되었는데 갑자기 그 동생이 전쟁에서 죽었으니, 얼마나 황망했겠는가.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동생을 잃은 슬픔이 보태졌으니 아버지는 슬픔에 짓눌려 살았을 것이다.
할머니 또한 남편이 죽은 슬픔 위에 아들까지 잃은 슬픔이 덮쳤으니 웃을 일이 있었겠는가! 내가 태어나 가족의 기쁨이 되어주긴 했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슬픔을 모두 날려 보내진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 슬픔은 아버지에게서도 내게서도 끝나지 않았다. 젖은 천의 물이 옆에 있는 마른 천을 젖게 하듯 나도 이 슬픔과 전쟁이 준 트라우마를 끊어내지 못했고 또 내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내 아이들 역시 내 문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제로, 보이지 않는 힘과 자기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자신이 떠내려온 물길의 이름을 알아야, 그 물길과 다른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자식에게 물려준 강물을 회수할 방법이 없으니까, 우리 가족의 이 슬픔의 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근원을 밝혀 그 물길의 흐름을 밝히고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내 아이들이 새로운 물길을 내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내 안의 눈물이 나의 것만 아님을 알 게 되었다. 그러면 나의 경계는 어디일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이 슬픔을 걷어내면 순수한 내가 되는 걸까? 아니면 이 유산 자체가 나의 본질에 속하는 걸까? 이 책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나의 경계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