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인의 일상

책을 만나다

by 크리스티나

세상 모르고 살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씀을 느닷없이 하셨어요. 여덟 살이 되었던거죠. 옆집에 저랑 같은 나이의 남자아이가 살고 있었고 그 아이 손잡고 함께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꽤 먼 거리를 두 분 어머니와 친구, 그리고 저까지 네 사람이 걸어서 갔었네요.


친구 어머니께서는 길을 잘 기억해서 돌아올 때도 꼭 같이 와야한다고 당부하셨고 친구에게 크리스티나처럼 걸음을 걸어보라고 잔소리도 하셨죠. 난생 처음 그처럼 사람 많은 곳에 간 것이었어요. 운동장에 줄을 지어 서서 기억나지도 않는 말들을 들었고, 입학식이라는 게 끝나자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교실로 갔었어요.


천둥벌거숭와도 같았던 산골아이가 학교에 가게 된 것이었고, 그곳에서 제 인생의 첫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첫번째 책이 교과서였죠. 종이 위에 글자가 쓰여 있고 그림도 곁들여져 있는 책이라는 사물이 신기했고 책장을 손으로 넘길 때의 느낌이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종이가 가진 독특한 물성에 처음으로 매료되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저는 종이책이 좋거든요.


책은 아무런 선입견이나 편견도 없이 저의 세상 안으로 스며들었고, 저의 책사랑도 마치 운명처럼 시작되었어요. 교실 뒤편에 놓인 책꽂이에는 높은 학년의 교과서들도 꽂혀 있었는데 저는 닥치는대로 읽어나갔어요. 아마도 학습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거나 책읽기를 강요받는 상황이었다면 제가 가진 반골기질을 고려했을 때 독서는 먼 이야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여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저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아이였고 다소는 방임된 상황 속에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나갔던 것 같습니다.


시골이라 책이 귀했고 학교 도서관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시절이라 독서와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살았어요. 그래도 우연히 책을 한 권이라도 만나게 되는 때면 그 책을 단꿀을 빠는 꿀벌처럼 탐닉했어요.


초등시절 마지막 겨울 방학 때 외갓집에 가게 되었거든요. 어머니께서 외사촌 언니도 있으니 방학을 그곳에서 보내라 하셨어요. 영천 산골이었는데 마을은 꽤 규모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다소 적막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언니가 친구집에서 책을 빌려다주었지 뭐예요. 심심할테니 이거나 보라는 식으로 툭 던져 주었어요.


탐정시리즈였어요. 셜록홈즈와 괴도루팡 시리즈물이었는데 흠뻑 빠져들 만큼 탐독을 했었어요. 처음 접하게 된 추리소설이 참으로 재미가 있었고 그때 저의 독서력이 한 단계 도약했다는 판단이 듭니다. 외갓집에서 보낸 그 겨울을 기억할 때면 눈발이 세찬 바람에 날리던 풍경과 그곳에서 지내던 내내 즐겨읽었던 책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후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같은 마을에 사는 고모댁에서 세계문학전집을 모조리 빌려다 읽었어요. 문학전집을 갖추고 살면서도 책을 읽지 않았던 사촌언니 덕분에 제가 호사를 누린 셈이 되었지 뭐예요. 하교하고나서 저녁을 먹고나면 달빛 환한 길을 따라 고모집에 가서 이미 읽은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려오는 일을 반복했고 드디어 어느 날에 그 전집을 모두 독파하는 날을 맞이했구요. 가진게 없었지만 남루하지 않은 시절이었어요.


그 이후로는 저도 입시에 신경을 써야 하는 형편이었던지라 독서가 자유롭지는 않았던것 같아요. 여고시절 용돈을 조금씩 받는 상황이 되어 그 돈을 아껴 읍내 책방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한두 권씩 사보았던 기억이 있을 뿐이네요. 학교와 집을 시계추처럼 오고가던 시절이라 그나마 책방에 가는 일이 제게는 숨쉴 구멍이었던 셈이었어요.


그 시절에 만났던 책 중에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을 기억하는데, 아내를 떠나보내는 시인의 절절한 감성에 가슴이 저릿했었고 시인이 묘사한 시골 풍경들이 관념이 아닌 실감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와 신선한 독서체험으로 기억되었어요. 교과서에서 접했던 작품들과는 다르게 제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느꼈거든요. 옥수수잎에 바람이 지나가고 세차게 비가 내린 후에 깨꽃이 소복이 떨어져 있는 풍경 같은 것들이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도종환 시인의 시에서 처음 경험했거든요.


작은 책방의 주인장을 꿈꾸었던 소녀는 지금 서점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운명처럼 시작되었던 책사랑이 구비진 인생길을 돌아 저를 이 자리에 서게 만들었네요.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치열했던 젊은 날도 아름다웠지만 한 걸음 물러나 이렇게 그 시절을 담담히 흘려보낼 수 있는 지금이 여유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모든 때는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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